검색

행복한 독자는 걸작만을 읽지는 않는다

글쓴이: Katikati Lighthouse | 2013.07.24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은희경의 두번째 소설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다양한 표정이 담겨있는 소설집이다. 그녀의 첫 장편 『새의 선물』(1995)에 나왔던 조숙한 열두 살짜리 소녀의 부자연스러움과는 많이 다른 그 다양한 표정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에 출간된 첫번째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1996)와 두번째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를 아직 읽지 않은 처지라서 뭐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등단 초기 그녀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붙여져 늘 따라다녔던냉소위악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이 책에서는 더 이상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이제 등단 5년차에 들어선 소설가로서 그녀가 제법 유연해진 탓이겠다. 그리고 등단하자마자 문학동네소설상(1995), 동서문학상(1997), 이상문학상(1998)을 잇달아 수상하면서 갖게 된 소설가로서의 자신감이 거기에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걸 서문에 다음과 같이 밝혀놓고 있다.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일에도 그 두 가지 사이의 길항작용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새벽에 국도를 달리다가 간이 휴게소에 들어가면, 희뿌연 안개 속에 트럭을 세워놓고 김이 풀풀 날리는 종이잔 커피를 마시는 운전기사들의 건강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그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고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기름에 전 수세미처럼 엉켰으며 화제는 자기들을 혹사하는 회사에 대한 거친 욕설과 노골적 음담들이다. 이 창작집에는 그 두 가지가 다 들어 있다. 첫 창작집에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주로 했다고 한다면 이 창작집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짓을 조금 더 해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이 잘되었는지 아닌지는 접어두고 익숙한 방식을 거부했다는 점이 내 마음에 든다. 나는 날로 배짱도 세어지는 것 같다. (4~5, <서문>)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마음이 기우는 쪽은 과정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모든 게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아니, 잘할 수 있는 일인데도 잘하지 못했으니 이건 그냥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패배라고까지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을 즐기게 된다. 그 즐거운 몰입이 눈부신 성공으로 나타난다면 더 바랄 게 없는 금상첨화이겠지만 형편없는 실패가 되어도 뭐 상관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경우엔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설상가상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일을 즐겼으니까. 이건 그 사람이 작가이든, 그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이든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재미있게 그리고 인상 깊게 읽은 작품도 은희경이 좋아하는 짓으로 써본 네 편의 단편들이었다. 표제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서는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아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사이에 존재하는 우연과 필연의 얽힘을 독백체로 풀어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더블(짝패)의 존재라는 흥미로운 테마를 한국과 브라질이라는 지리적 대척점으로 변형시켜 꿈과 현실이 넘나드는 판타지의 서사 형식으로 담은 「지구 반대쪽」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 세 남자와 한 여자가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농담들과 기이한 밤외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여름은 길지 않다」도 참 재미있었다. 구체적으로 한 장면을 인용해 보자.




 



우리 셋 중에서는 오래가 유일한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는 한때 원조행동하는 양심의 서열 32위쯤 되는 국회의원 밑에서비서관이라는 직함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의원이 낙선한 뒤로는 아직 아홉 벌이나 남아 있는 명함과 함께 폐기처분되었다. 지금은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혁희와 나에게만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 혁희가 입가에 허연 맥주거품을 매단 채로 오래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교통사고가 났어.



“그래, 사람은 좀 죽었고?



“이백삼십칠명이라던가?



“너 비행기 타고 갔다 왔구나?



“다들 몸통이 산산조각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어. 조각을 찾아 붙이느라고 야단이야. 앰뷸런스하고 소방차가 팔십대는 왔을 거야.



“뭐하러 왔대?



“발밑에 머리통 굴러다니니까 농구하려고 왔겠지. 근데 드리블이 영 신통찮아.



“넌 용케 몸통을 빨리 맞췄다. 솜씨는 형편없다만.



“끊어진 목을 헬맷같이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던 사람만 아니었으면 더 빨랐을 거야.



“그 사람이 네 어금니가 자기 앞니라고 내놓으래?



“아니, 눈을 흘기잖아. 무서워서 혼났어.



“니 눈은 안 무섭고?



“손가락 찾는 데 제일 시간 걸리더라. 알고 보니 스무 개나 되대. 그걸 모르고 지금까지 코 후빌 때 네 개밖에 안 써봤잖아. 어릴 때부터 갖고 놀 건 이 손가락밖에 없었는데.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네 손가락 있잖아! 하고 소리쳤어.



오래는 어린 시절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최근의 일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심했다. 건망증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라고 우기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잊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것이 잘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까지. 십오분 전에 가위바위보에 져서 맥주를 사러 간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구는 것만 해도 그렇다. (195~196, 「여름은 길지 않다」)




 



은희경은 이 작품을 두고읽기에 가장 지루하고 쓰기에는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이라며 이 작품을 읽을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두고 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작가인 그녀 못지않게 독자인 나도 지루한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한낮의 열기가 많이 가셨지만 아직 더위는 남아 있는 한여름밤의 대기처럼 유쾌한 열기와 함께 끈적끈적한 땀도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문장은 은희경의 새로운 면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낯섬이었다. 마지막으로 「인 마이 라이프」에서 다루고 있는데자뷰도플갱어역시 내가 좋아하는 테마들이어서 흥미로웠다.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시도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녀의 말대로작품이 잘되었는지 아닌지는 접어두고오로지 쓰는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앞섰던 것인지, 군데군데 문장들에 빈틈이 보이고 또한 이야기의 흐름과 서사의 구성에 있어서도 허술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새로움은 이전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어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지기 이전에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의 완성도를 따지자면 이 책의 말미에 해설을 쓴 평론가가 상찬하고 있는 작품들인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멍」, 「서정시대」를 앞세워야 할 것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은희경에게 있어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속하는 이야기, 즉 가족이라는 제도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시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 사랑과 삶의 이면에는 또다른 진실이 감추어져 있음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겹의 서사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데뷔 때부터 그녀가 일관되게 다뤄온 주제이며 방식이기에 문장에서도 서사의 전개와 구성에 있어서도 능숙한 작가의 솜씨가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 능숙함이 내게는구태의연한성공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이 세 작품을 읽을 때는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표제로 삼은,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로부터 빌려왔다는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잠언은 아마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뭘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할까? 사랑에 막 눈뜨기 시작하는 청춘이라면내가 사랑받고 있을 때라기보다는내가 사랑하고 있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소설가라면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쓸 때라기보다는내가 좋아하는 것을 쓸 때라고 답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은희경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독자란? 두말할 것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걸작이라고 부르는 책을 읽을 때라기보다는내 마음에 딱 드는 작품을 읽을 때일 것이다. 그게 별로 주목받지도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은희경의 소설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그런 단편들 몇 작품을 만날 수 있었으니 나는 행복한 독자다.

전체목록보기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