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healing)이 대세라고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2000년 7건, 2011년 435건에 불과했던 ‘힐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의 수가 2012년에 지난해 9,385건으로, 그리고 올 들어서는 6월까지 만해도 1만 2,447건으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서울신문 2013년 7월 13일자 기사, “몰아치는 ‘힐링 열풍’ 빛과 그림자”) 치유를 의미하는 영어가 언젠가부터 우리네 삶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너도나도 사용하다보니 치유를 행하는 주체가 애매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힐링을 화두로 삼는 연예프로그램도 생겨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신변잡담에 머물거나 심지어는 초대손님이 숨기고 싶은 이야기까지 까발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힐링’은 쌓이는 스트레스나 마음에 생긴 커다란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힐링열풍이 불고 있는 현상은 우리들 삶이 그만큼 고단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공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란 마음을 다스리기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보면, 사람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즉 독서와 사유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힐링 프로그램을 통하여 위로와 다독임을 받았는데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힐링을 받을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어떤 묘방을 써도 기대만큼 효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한다는 힐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힐링이 마술 호리병에서 ‘퐁’하고 튀어나오는 지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개념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던 중에 우연히 읽게 된 프렌티스 멀포드의 <생각이 실체다>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힐링은 바로 19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태동한, 마음에 의한 치유를 구하는 ‘신사상 운동’에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신사상 운동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① 4복음서, ② 초절주의 혹은 에머슨주의, ③ 버클리의 관념론, ④ 심령론, ⑤ 낙관주의적 대중과학 진화주의, 그리고 ⑥ 힌두이즘이 있었다고 합니다.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프렌티스 멀포드는 신사상주의가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834년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멀포드는 20대 선원생활을 통한 다양한 모험을 배경으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883년 뉴저지주의 어느 강가에 터를 잡고 사유와 집필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택에 대하여 멀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고 합니다. “1884년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이 지상에서의 어떤 새로운 사상 혹은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갈 필요가 있었던 것은 어떤 신비로운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를 시작했다.(17쪽)” 멀포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호수가 생활을 연상케 하는 뉴저지 강가에서의 생활에서 얻는 사유의 결과를 담은 에세이를 발표하여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에 수록하였고, <생각이 실체다>는 여기에서 발췌한 에세이를 엮어 1908년에 영국에서 발간된 것입니다. 한 세기 전에 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 가운데는 현대에 와서 개념이 바뀐 것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멀포드는 인간은 몸의 마음과 영의 마음이라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형태를 지닌 물질들의 배후에 있고, 어떤 점에서 보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을 우리는 영이라 부른다.’고 전제한 멀포드는 ‘몸의 마음 혹은 물질적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 혹은 신체적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생명과 사물을 보고, 추론하며,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마음을 형성하게 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물질적 마음은 몸의 죽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끝이라고 보지만 영적 마음은 몸의 죽음이란 단지 소모된 수단이 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쉽게 설명하면, 물질적 마음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사람들을 다룰 때 필요한 힘은 말이나 글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단지 설득하는 능력에만 있다고 보는 반면, 영적 마음은 당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나 이익에 반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영향력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마음이 치유능력을 가지는 것은 “완전한 건강, 쇠퇴로부터의 자유, 몸의 약함과 죽음의 극복, 신체의 한계를 벗어난 통행과 여행, 관찰의 능력 등을, 혼자서 하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건, 고요한 마음이나 생각의 작용과 작동을 통해 얻는 방법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힐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과를 얻지 못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만, 멀포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개선은 내부로부터 와야만 한다. 그것은 자율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나 영향에 의존해서는 개선이 될 수 없다.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개선이다. 그러한 개선은 그것을 추진한 사람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실패할 것이다.(70쪽)” 따라서 힐링을 인도하는 분도 힐링이 필요한 분이 스스로를 변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의 토양을 바꾸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최근 우리사회는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날선 공방이 오가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 무렵부터 극심해진 것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 사상적, 논리적 대응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에 유리한 것들만 읽고, 반대편 논리에 유리한 것은 외면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주장을 두루 섭렵하여 근거의 경중을 따져 논리를 세워야 상대를 설득할 기회도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공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멀포드는 마음공부를 할 때 지켜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 못을 보고 좋은 것은 하나도 볼 능력이 없는 편파적이고, 냉소적이며, 독설적인 마음들이 쓴 것들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불건강한 생각의 흐름을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 언제나 적의와 독설을 바른 화살은 그것을 쏘는 자에게 치명적인 것이 된다.(87쪽)” 편파적인 마음가짐은 부지불식간에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평하고 가치중립적인 생각의 흐름을 살리는 것이 힐링의 기본요건이 되는 셈입니다.
신사상이 힌두철학 특히 요가체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만, 멀포드는 북미 원주민의 삶과 동양철학에서 얻은 일종의 선(禪)에 가까운 생각을 적기도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게 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정신 상태로 인해 몸이 아무런 신체적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107쪽)” 이는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통하여 영적능력을 키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평소 천천히 생각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집중하는 명상훈련을 통하여 마음이 늘 평정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힐링이 갑작스럽게 대두되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은근과 끈기’를 특징이라고 하던 우리 국민이 어느새 ‘빨리빨리’로 특징이 변하게 된 것처럼 관심의 주기가 빨라졌기 때문입니다. ‘힐링’이 주목을 받기 전에는 ‘참살이(웰빙)’가 관심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힐링이 기울고 행복이 떠오르고 있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정신과의사 고든 리빙스턴선생이 <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http://blog.yes24.com/document/7323372>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제가 바로 행복이란 점이 생각납니다. 리빙스턴선생은 모든 생물이 그렇듯 사람 역시 혼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1906년에 발표한 <파랑새>라는 이름의 아동극에 나오는 파랑새가 행복을 의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동극이 우리의 행복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행복은 우리가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는 것인데, 결국은 관계라는 것도 마음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보면 “행복의 과학은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는 데에 있고 건강한 삶의 원천들로부터 생각을 이끌어 내는 데에 있다.(136쪽)”는 멀포드의 행복에 관한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랑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 혹은 물과 같은 실질적인 엘리먼트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살아가고 움직이는 힘이며, 우리를 포함하는 보다 더 큰 생명의 세계 속에서, 물질적 감각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지만, 대양과 같은 물결과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143쪽)”라고 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늙어감의 의미를 바꾸고 있습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결국 불로초를 손에 넣지 못했던 진시황이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현대의학 아니 미래의학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시간여행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요즘 우리사회에 광풍처럼 불고 있는 불로(不老) 추구현상이 정작 필요한 젊은 정신은 외면하면서 젊은 몸만 생각하는 편향된 마음의 병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해봅니다.
멀포드는 늙어감 역시 마음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한 늙고 추한 모습의 이미지 혹은 형상에 대한 두려움이 몸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 늙어가는 표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젊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이며, 마음이 오래 될수록 이전의 많은 존재들로부터 얻어온 힘이 그만큼 더 많기 때문에, 몸의 젊음과 활기와 유연성은 더 잘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멀포드의 생각을 풀어보면 독서와 사유를 통하여 선각자들의 깨우침을 공부하고 마음을 다스려나가면 정신이 건강해지고 결국은 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사상주의가 성경과 기독교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사상운동은 신(God)의 의지를 배우고 그 의지의 활동에 협력하는 것을 통한 치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신중심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적이기 때문에 제도권 종교계에서는 이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영은 신, 즉 무한한 힘 혹은 위대한 신이 깃든 영의 일부이다.(183쪽)”라고 한 멀포드는 신을 정의하여 “최고의 능력과 최고의 지혜가 우주를 지배한다. 최고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한 공간 안에 충만한다. 최고의 지혜, 최고의 능력, 최고의 지성이 원자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있다.(28쪽)”면서 모든 것들이 신의 무한한 영혼의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 선 혹은 신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신을 특정 종교에 국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멀포드의 메시지가 담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와 갈망은 수 세기 동안 확장되었고 증가되었다. (…) 인간의 삶과 그것이 관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빛,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결과가 이 땅에 도래하고 있다.(270쪽)” 물질적인 것에 매달려 정신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선각자가 주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