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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당하지 않았던 자들의 기록...

글쓴이: REMEMBER 0416 | 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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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퍽. 아버지의 손찌검이 내 왼쪽 뺨에 뜨거운 불을 댕겼다. 몇 번인가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는가 싶더니 밥상이 발에 차여 뒤엎어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뒤이어 날아온 손찌검이었다. 학창시절에 유도를 했다는 아버지는 특히 손이 매서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격한 통증이 생각마저 일시정지 시켜버렸는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통증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간다는 건 이리도 아픈 것이구나 하는 통증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 때 꺾이고 말았던 내 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진옥섭의 '노름마치'를 읽노라니 불현듯 다시금 그 때의 통증이 떠올랐기에 해 버린 것이다. 얼얼하고 화끈 거리는 것이 참으로 생생하게도. 하지만 지금 내게 그건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정말은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꿈을 믿고 그 꿈을 향해 줄기차게 펄떡거리던 '노름마치'에 나오는 예인들과 달리 이미 현실적인 삶 저 깊이 스스로 익사해 버린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하나의 인큐베이터가 되어 자신의 꿈을 소중히 품고 길러온 이는 한 번은 꼭 꿈이냐 현실적인 삶이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꿈은 이루기가 어렵고 현실적인 삶의 유혹은 달콤하기에 많은 이들이 결국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현실적인 삶 아래로 익사한다. 날개를 접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현실의 중력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현실적인 삶이란 그러한 익사자들로 넘쳐나는,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길에 만나게 된다는 망각의 강 '레테'와도 같다. 모두가 좀 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꿈이 있었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망각하려고 기꺼이 레테의 강물을 들이키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익사당하지 않으려 끝까지 저항하면서 쉴 새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를 휘저으며 헤엄치는 이들이 있으니 '노름마치'에 나오는 예인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다.


 




 진옥섭의 '노름마치'는 익사당하지 않았던 자들의 기록이다.


 




 예인의 길은 어려웠다.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 다 그렇듯이 남들보다 몇 배의 땀에 몇 십 배의 눈물을 더하여 여름날 장맛비처럼 오래도록 뿌려져야 가능했다. 힘들수록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고자 한다. 그렇게 누군가 그 길의 어려움과 수고로움을 인정해 주기라도 했다면 걷는 걸음이나마 조금은 수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받게 되는 건 무시였고 참아야 하는 건 냉소일 뿐이었다. 길은 한 없이 고독했다.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고 묻고 논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대로(大路)로 가지 않고 작고 험난한 소로(小路)를 택한 자의 숙명이었다. 가난이 숙명이었듯이.


 




 그저 사나운 물결 가득한 강물을 떠내려가는 널빤지와 같았다. 물굽이마다 바닥을 뚫으려는 송곳처럼 매서운 바윗돌들이 있었고 뒤집어엎으려는 굵은 가지들이 앞에서 떠다녔다. 아무리 노력한들 낭떠러지를 피할 순 없었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달했다 한 들 남는 건 텅 빈 배처럼 아무 것도 없기가 일 수였다. 그저 잠시의 허기만 달랬을 뿐.


 




 사람들이 보는 춤에는 노름마치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이 꿈꾸는 예(藝)에는 노름마치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들의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그들은 추었다. 불렀다. 뛰었다. 어느 때는 가슴에 움푹 배여든 설움을 추고 어느 때는 달랠 길 없는 허기를 몸으로 노래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한을 밤하늘을 덮듯 크게 너울거리는 하얀 무명 소매로 다독거렸고 자꾸만 속살거리며 포기하라고 부추기는 달콤한 유혹을 삼박자로 휘돌리는 발놀림으로 빠져 나갔다. 그들은 중단 없이 길을 받아들였고 또 새로이 길을 열었다.


 


 




 




 


 나는 이 분들의 예를 논할만한 깊이가 없다. 얼마만큼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가늠할 눈도 없다. 진옥섭의 경탄할만한 문장 속에서 내 눈이 향하는 곳은 무대 위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손으로 한 자 한 자 꼭 꼭 눌러가듯 내 눈이 머무는 곳은 무대 밖 그들의 삶이다. 공옥진은 신산했던 그네의 삶을 다 이야기하려면 "빼먹고 이야기해도 삼국지 일곱 권'이라 했다. 그 말 대로다. 그들의 삶에 비한다면야 무대란 그들의 진짜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 진옥섭은 그들의 예(藝)를 논할 때 자주 시간이라는 말을 쓴다. 그에게 '예(藝)'란 무엇보다 시간의 체험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란 지금 막 무대에서 펼쳐지는, 재현된 그 순간의 시간이 아니다. 정말은 집약된 시간이다. 그네들의 인생 여정을 속속들이 다 아는 진옥섭에게 무대 위 춤사위가 그 순간 막 태어난 것으로 결코 보일 리 없다. 진옥섭이 하나의 손동작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거울 사이에 놓여있는 것과도 같이 무수한 손동작의 연쇄로 보이리라. 무수한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익사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지속된 그 장구한 손의 역사 자체로 말이다. 그건 저 깊은 뿌리로 부터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져 가지 가득 꽃으로 활짝 피어난 것과도 같으니 그만한 시간 체험 앞에서 누군들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아예 절대의 시간이라고까지 말한다.


 


 나도 그랬다. 비록 그들의 공연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압도적인 집약된 시간만큼은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더 큰 건 부끄러움이었다. 별것도 아닌 난관 앞에서 날개를 쉬이 접어버린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병아리가 물을 마실 때 그러하듯이, 몇 번이나 책에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그 먹빛 가득한 하늘이 그대로 내 마음 같았다. 재독했다. 할 수 밖에 없었다. 간절한 바람이 생겼으니까. 물들고 싶었다. 쪽빛이라면 쪽빛으로, 다홍빛이라면 다홍빛으로 그들이 보여준 헤엄에 오롯이 물들고 싶었다. 지쳐버린 내 손가락이 다시 꿈틀거릴 수 있었으면 했다. 발버둥을 멈춘 내 두 다리가 다시 힘차게 물살을 가르게 되기를 바랐다. 권태로 인해 정지된 내 폐가 다시 숨을 쉬며 무기력에 빠진 심장이 다시금 벅찬 의지로 요동치기를 빌었다. 커다란 징소리로 눈이 번쩍 뜨여지고 요란한 꽹가리 소리처럼 가라앉기만 하는 몸이 다시금 힘하게 헤엄치기를 바랐다.


 




 재독을 끝낸 날, 꿈을 꿨다. 밤하늘 아래로 수많은 연어들이 뛰어오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꿈이었다. 힘차게 뛰어오르는 연어의 등이 달빛을 받아 쨍하니 눈부셨다. 강은 그러한 눈부심으로 가득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무수한 첨벙거리는 소리 때문에 강 자체가 고동치는 눈부신 은색 심장으로 보였다. 익사당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헤엄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사는 것이었다. 진정한 삶이란 바로 그러할 때라야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꿈에서 나는 너무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백이기도 한 이 글을 남겨둔다. 이제는 빈약한 이유로 다시는 쉽사리 날개를 접지 않겠다는 다짐의 증거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쓰는 지금 내 열 손가락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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