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을 읽은 일은 힘들다. 왜냐하면 대부분 잔인한 고통의 기록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일이라 해도 소설을 읽는 동안은 현실로 다가온다. 한데 미국 역사 속 노예제도를 다룬 캐슬린 그리섬의 <키친 하우스>는 좀 달랐다. 아니, 특별했다. 분명 소설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로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보여주지만 안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설은 18세기 말 담배농장을 배경으로 농장주인 제임스와 아내 마사의 자녀들과 흑인 노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백인인 주인들이 거주하는 빅하우스와 노예들이 음식을 만들며 생활하는 키친하우스, 두 개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사랑을 벨과 라비니아의 화자가 들려준다. 벨은 농장주의 딸로 빅하우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노예가 되었고, 라비니아는 백인이지만 고아라서 농장에 노예로 팔려온 것이다.
어린 라비니아는 자신을 돌봐주는 벨과 노예 가족들과 생활한다. 하지만 피부 색으로 사는 곳이 달라지고 누군가를 주인으로 모시는 일들과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예 조지와 마에는 그런 라비니아를 딸처럼 사랑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저 닭들을 봐. 어떤 닭들은 갈색이고 어떤 닭들은 하얀색이고 또 검은색도 있어. 저 닭들이 병아리였을 때 어미 닭과 아빠 닭이 그런 걸 신경 썼을 것 같니?” 38쪽
라비니아가 키친하우스와 빅하우스를 오가며 생활하며 자라는 동안 농장에서는 많은 사건이 발생한다. 벨이 남편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마사는 벨을 경멸한다. 사고로 딸마저 잃고 힘든 삶을 마약에 의지한다. 농장의 감독관 랭킨은 여자 노예들을 겁탈하며 폭행을 가하고 제임스의 아들 마셀도 가세한다. 그 일로 벨은 마셀의 아이를 임신한다. 때문에 조지와 마에를 중심으로 노예들은 더욱 끈끈한 가족애를 발휘한다. 그러다 병으로 제임스가 마사의 언니인 사라와 매든 부부가 농장을 관리하고 아픈 마사와 라비니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벨과 라비니아는 같은 노예 신분이었지만 피부 색의 차이로 그들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벨은 여전히 학대를 당하며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아름다운 숙녀가 된 라비니아는 마셀과 결혼하여 빅하우스의 주인으로 돌아온다. 마셀과의 사이에 딸을 낳아지만 빅하우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고 자신을 예전과 다르게 자신을 대하는 키친하우스 식구들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마셀과 갈등은 커지고 마사처럼 라비니아도 마약을 찾는다. 마셀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라비니아는 흑인들의 도주를 돕고 딸과 함께 빅하우스를 떠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 마사가 죽고 빅하우스는 불에 타버리고 마셀은 아들인 벨의 총에 맞아 죽는다. 모든 게 끝났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
소설은 매우 잔혹하다. 노예의 삶,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존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생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어 가능했다. 이 소설이 빛을 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다룬 소설이지만 사랑과 우정에 초점을 두었기에 특별한 소설로 기억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우정, 그것은 삶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므로.
“아가, 이 세상에는 네가 아직 모르는 것들이 있어. 우리는 네 가족이고,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네가 백인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네 가족이야. 마마는 언제까지나 네 엄마고 벨은 언제까지나 너의 벨이란다.”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