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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

글쓴이: 인생도처 유상수 | 201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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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 것 같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책읽기. 그동안 많이 봐왔다면 봐온 책이지만 책이란 내가 만나야 되는 당위성의 원칙이 적용되는 대상이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게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즐거움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스스로의 위로가 주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독서여정에 결정적인 계기가 생긴 것은 3년 전 겨울이었다.


 


  어느 날 서고를 바라보다 문득 시선을 잡아끄는 책을 발견했다. 구입하고서도 바쁜 일정에 읽지 않은 책들이 간혹 있던 터라, 그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일거라 생각했다. 기대감에 책의 첫 장을 여는 순간, 거기에 써져있는 기록을 보았다. 난 책을 읽게 되면 첫 장에 읽기시작한 날을 , 다 읽으면 마지막 장에 읽은 날짜와 한 두 줄의 짤막한 감성을 기록해두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첫 장에도 마지막장에도 내가 책을 읽게 되면 의례히 하는 행위의 흔적이 버젓이 남아있었다. 읽은 날을 확인해보니 불과 6개월 전이었다, 고작 6개월 전에 읽은 책인데 내용은 고사하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은 거였다. 충격이었다. 그동안 책을 읽는다고 읽었지만, 이런 식의 책 읽기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때의 그 황당함과 좌절감은 지금 생각해도 그 허망함이 가슴을 때린다.


 


  그때부터 제대로 된 책읽기는 내겐 화두였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를 고민하던 중 어느 책에선가 리뷰를 써라는 내용을 봤다. 그때 본 책에는 저자가 책을 보고 마지막 책 페이지에 자신의 리뷰를 간단히 정리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읽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리뷰를 정리했다. 물론 대여섯 줄에 그친 간단한 소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책이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였다. 그전에는 책을 읽으면 좋은 구절에 줄은 치지만 거기까지였다. 책은 도끼다에는 박웅현이 책을 읽고 밑줄 친 부분을 따로 정리해서 바인딩 해둔다고 했다. 사실 그전에는 책을 읽고서 밑줄을 치긴 했지만 그 책을 다시보지 않는 한 밑줄 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박웅현의 책을 읽은 이후로 그를 따라서 책을 읽고 밑줄 친 부분만 따로 필사하여 바인딩을 했다. 나중에는 컴퓨터를 사용해 타이핑하고 출력하여 바인딩 해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줄 친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견출지도 붙였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정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전에는 책을 깨끗이 보기위해 어떤 표시도 하지 않았지만, 책의 여백에 책을 읽을 때의 감성도 기록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여전히 책을 읽고 난 이후의 기억의 잔재는 오래가지 않았다. 물론 혹자는 책을 보는 것은 콩나물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콩나물시루 밑으로 물은 다 빠져 나오지만 콩나물이 커가는 것처럼, 우리가 책을 보면 그 내용이 다 잊어먹는 것 같지만 그 책의 내용이 가슴속에 남아 삶을 키운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로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책을 기억을 잡기 위해선 더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책의 뒤표지에 쓰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한다는 것을 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끔 들르던 YES24를 통해 알았다. 그때부터 책의 뒷장에 쓰던 리뷰를 YES24의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된 블로그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YES24에는 많은 블로그들이 리뷰를 남겼고, 책에 대한 정보도 그 리뷰를 통해 얻었다. 하지만 그들의 리뷰와 내 리뷰를 비교해보면 내 리뷰는 애들 장난이었다. 글의 절대량도 적었지만 리뷰의 깊이도 리뷰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저 그런 초등학생수준의 독후감정도였다. 다른 블로그 분들의 리뷰로 인해 충격을 먹은 나는 이왕에 시작하는 거 제대로 된 리뷰쓰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고자 참고서적과 각종 자료를 조사하던 중 우연찮게 인터넷을 통해 가까운 곳에서 리뷰쓰기 강좌가 있는 걸 발견했다. 나중에 듣기론 리뷰쓰기 강좌는 잘 열리지 않는 강좌였다. 물론 내가 그 강좌를 들은 다음에도 다시는 같은 과정은 개설되지 않았다. 정말 우연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두 달에 걸친 과정이었다. 첫 시간에 강의를 마치고 강사께서 본인이 쓴 리뷰를 메일로 보내면 첨삭을 해주겠다고 했다. 첫 주부터 시작하여 강의가 끝나는 날까지 매주 2편이상의 리뷰를 써서 강사에게 보냈고, 전주에 보낸 리뷰에 대해서는 강사가 직접 출력하여 첨삭을 해서 다음시간에 전해주었다. 문맥의 난해함이나, 이야기의 비약, 그리고 문장의 잘못된 부분을 아우르는 세세한 첨삭지도는 내겐 엄청난 가르침이었다. 리뷰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지도도 겸해서 받은 것이다. 그때 첨삭지도를 받은 리뷰는 지금도 보관하고 가끔 들여다볼 정도로 귀한 가르침이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강사가 말하기를 수강생 80명중에 리뷰를 제출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으며, 20편의 리뷰를 제출한 사람도 강의이후로 처음이라고 했다. 강의 기간 중에도 강의가 끝나면 강사 분께 차 한 잔 대접한다는 핑계로 단한주도 거르지 않고 첨삭에 대한 부분과 글쓰기에 대한 개인지도까지 받았다. 그것도 거의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출판사 편집장이었던 강사 분께서는 모든 열과 성의를 다해 지도해 주었다. 그걸 계기로 내 리뷰가 획기적으로 변하듯 하다. 초창기 리뷰를 지금 읽어보면 웃음만 나온다. 그만큼 아무것도 모르고 되는대로 써내려갔으니. 물론 지금도 가끔 그 첨삭지도를 해주신 리뷰와 강의록을 본다. 볼 때마다 아직도 리뷰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잘못된 방법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리뷰는 글쓰기가 아니다. 바르게 읽기다. 리뷰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강사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강의의 대부분이 어떻게 하면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책을 제대로 읽기위해 강사께서 가르쳐주신 내용 중 독서 삼독讀書三讀이 있었다. 즉 책은 세 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Text()를 읽고, 둘째는 작가를 읽고, 셋째는 나를 읽으라는 것이다. 이는 풀이하자면 첫째, 책을 읽고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둘째는 작가가 왜 이 책을 썼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책을 읽으면 작가의 소개는 그냥 건너뛰고 텍스트만 읽었다. 하지만 작가의 성장과정과 그의 삶을 내다보지 않는 책읽기는 오독의 우려가 많다고 했다. 오독은 독서가가 가장 조심해야 할 항목이다. 오독으로 인해 좋은 책이 나쁜 책이 되기도 하고, 나쁜 책이 좋은 책이 되기도 한다. 오독은 우리가 병이 났을 때 약을 잘못 처방하는 것과 같다. 물론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아 생기는 오독도 있지만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독도 있다. 후자의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책을 쓰게 된 계기와 그의 삶의 여정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했다. 작가의 삶을 알면 책에 보이지는 않지만 행간에 담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연금술사로 유명한 파올로 코엘료는 처음부터 작가는 아니었다. 음반회사의 잘나가는 중역이었던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작가가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의 대표작인 연금술사의 양치기소년의 이름이 왜 산티아고였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삶의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의 안겨준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노인의 이름이 왜 산티아고인지, 작가는 다르지만 그들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왜 같은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건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작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작가의 생각과 글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는 것이 바로 나를 읽는 것이다. 그건 사색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색이 없는 책읽기는 그냥 책을 보는 것일 뿐 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리뷰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 이 세 가지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숙성이다. 책을 보고 나서 바로 리뷰를 작성하는 게 아니라 이삼일 정도 책의 내용을 되새겨본 다음 마음에 떠오르는 감성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리뷰라고 했다. 지금도 난 이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 가끔은 숙성의 기간이 너무 길어져 망각의 계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거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아 숙성의 기간에도 감성이 우러나지 않거나, 책의 내용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같은 책을 다시 읽기도 한다. 최근에는 좋은 책을 만나 그 책과 헤어지기가 힘들어 다시 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다시 읽을 때의 책은 이전에 읽은 책과 같은 책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책이 된다. 그런 기쁨들이 한번 읽은 책을 다시 뒤돌아보게 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 후 헤어짐의 아쉬움에 연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


 


  다음의 가르침은 지독遲讀이었다. 지독이란 말 그대로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천천히 읽는 것이 아니다. 지독을 위해서는 독서사도讀書四到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 아니라 도. 이 도는 일정한 경지에 다다른다는 의미다. 이 도야말로 도. 독서사도讀書四到란 안도眼到, 구도口到, 심도心到, 수도手到이다. 이는 주자의 독서삼도인 안도眼到, 구도口到, 심도心到에 수도手到가 더해진 것이다. 안도란 눈으로 보는 것이고, 구도란 침묵으로 읽어가거나, 낮은 소리로 읽는 것이고, 심도란 문장을 되새김질 하며 사색을 하는 것이다. 수도는 좋은 구절을 기록하거나, 심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리뷰로 기록하는 것이다. 리뷰쓰기 강좌 때 배운 것은 여기까지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낭송을 통한 이도耳到가 포함되어 진정한 독서의 경지인 독서오도讀書五到에 이르는 것이다. 여러 책과 리뷰쓰기 강좌를 통해 얻은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독서사도에 개인적으로 이도耳到를 포함하여 독서오도를 만들었다. 이도耳到란 마음에 드는 좋은 구절들을 수도와 구도를 통해 외워 암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암송한 구절의 소리를 귀로 듣는 것, 그게 이도耳到이다. 우리네 선조들이 같은 책을 수 십 번 다시 보며, 호롱불을 밝혀놓고 밤늦은 시간에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암송했던 게 바로 이도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이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어린애의 울음소리, 늦은 밤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 새색시 다듬이질 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게 바로 독서오도이고 지금 내가 하는 독서법이다.


 


  독서오도를 실시한 이후로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지가 달라졌다. 지금은 매일 아침 출근하면 좋은 구절이나 이해가 되지 않아 책상 앞에 붙여둔 문장을 소리 내어 암송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에 유레카를 외치게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밤하늘에 불꽃놀이처럼 머릿속에 불꽃이 터진다. 외우고자 하는 문장은 외워졌다고 생각하면 내용을 바꾼다. 큰소리로 낭송을 해도 이른시간이라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니 눈치 볼 일도 없다. 하루가 시작되는 경건한 시간에 좋은 구절을 암송하면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지고 사뭇 경건해진다. 다음엔 시집을 꺼내 시 한편을 필사한다. 그리곤 보던 책을 꺼내서 계속 읽거나 리뷰를 작성한다. 이제야 책을 본다는 것이, 아니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다. 아직도 책읽기라는 여정에서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찰흙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길이 이제는 흐릿한 안개 속이나마 길의 흔적정도는 어렴풋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더듬더듬 그 길을 짚어가며 책을 읽으니, 어느 순간부터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열리니 책도 마음을 열어 그 속내를 보여준다. 서로가 마음을 여니 모든 문구가 다 새롭다. 그동안엔 내 자신을 온전히 닫고 편협 된 시각으로 책을 대하니 아무리 좋은 문구와 좋은 내용을 만나도, 책을 덮는 순간 그 내용은 허공 속에 사라지고, 깨달음이 아닌 그저 하나의 지식만 남았다. 책과 일체화가 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이 머리가 아닌 가슴에 들어온다. 단 한권의 책을 읽더라도 제대로 책을 대하는 것이 수 천 권의 책을 읽고 변화되지 않는 것보다 더 낳다. 그래서 책이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듯하다.


 


  책을 읽다 중단하면 다음 구절이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치겠다. 사랑하는 연인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이보다 더 간절할까. 마치 수 십 년을 짝 사랑하던 여인과의 첫 데이트를 앞둔 것처럼 책이 보고 싶어진다. 그러다 책과 마주하면 행복하다. 구절구절을 읽어 내려가다 나의 눈길과 사색을 잡아 이끌게 하는 구절들이 주는 행복감,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깨달음이 선사하는 가슴 가득한 충만감. 그리고 전해져오는 삶의 진정한 의미들이 주는 울림. 온몸에 닭살이 돋고, 박하사탕을 입에 머금은 듯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롭다.


 


  이제야 왜 책을 보는지,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아니 느끼고 있다. 가슴에 울림을 준다는 말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매일매일 들려오는 그 울림으로 인해 세상을 관조하는 나의 시선이 변화되고 있음이. 책을 읽다 문득 머릿속이 화사해지며, 밤하늘에 벌어지는 불꽃놀이처럼 반짝거리는 깨우침이 주는 그 화려한 환희의 순간을. 그 환희의 순간 온몸을 휘감아 스쳐가는 그 무한한 행복감에 몸서리쳐지는 그 극한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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