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Jacoues Ranciere)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Aux bords de politique, 1990>(2013)에서 '정치적인 것(La politique)'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며,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La 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와 치안이 만나는 현장이다. 라고 정의 내려준 사람은 이현우였다.
나는 이 구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냥 읽고 넘기기에는 너무 아쉬운 나머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가장자리(Aux bords)에서 맴돌고 있었다. 분명 자크는 정치의 테두리를 충돌의 과정에서 벗어난 경계의 장소라고 단언하였다. 그 경계에 머물고 있는 원주민들 혹은 경계인들은 자크에 정의에 따르자면 ‘소송’은 불가한 것이다.
이 철학을 가지고 프랑스의 정치적 지형도를 대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이 용어가 비정규직이 만연한 이 땅에 지식상들에 의해 수입되는 순간 아카데미 안에서도 변질되어 설명되어지거나 지식인 카페에서도 왜곡되어 전파되는 모습을 종종 목격담을 경험하거나 그 과정을 청취하는 과정은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다.
1968년 5월 혁명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자크의 ‘해방’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에서 벗어난 19748년 8월15일로 소환되는 용어로 흔히들 사용하고 한다. 그러기에 단지 그 해방이라는 즉 신체적/정신적 자유를 뜻하는 그 둘을 묶는 함축적인 의미에 용어에서 우리는 그 반반 사용하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는 한창 집단적인 집회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 당시 2008년 방한했던 시절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철학교수 진태원에 질문에 이러한 대답을 한다,
진태원=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란 책에서 당신은 ‘치안’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인가?
랑시에르=사실 그 개념들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를 ‘국가가 사회를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본다. 치안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고정된 자리와 정체성을 배분하는 작업이다. 이런 치안의 논리를 문제 삼고, 여기에 새로운 집단성을 개입시키는 활동이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는 부·지식·가문 같은 자산의 크기에 따라 사회를 분할하는 치안 논리에 맞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 능력을 가지고 통치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활동의 주체가 지금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으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여기 살아가는 좀비들의 행렬에 대해서 치안이라고 불리고 싶은 행정부는 그 자정작용을 가지며 그들을 치료 할 수 있는가?
“정치의 본질은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그대로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 라는 구절이 귓가에 계속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