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사람들/이수광/지식의숲
전국의 천주교 성지를 답사하고 순교자들의 고통을 체험한 후에 1866년 병인박해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박해사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달레 신부가 조선에 있던 프랑스 신부들의 편지와 자료를 수집하여 출간한 《조선 천주교회사》의 기록을 많이 참조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사는 그 자생적 특이성을 인정받고 있다.
스스로 천주교를 들여와 발전시키는 과정의 참혹한 탄압 사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국가 통치 근간인 성리학을 부정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패륜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세력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상 때문이었다.
질병과 가난에 신음하고 수탈당하던 백성들에게 천주를 믿으면 모두가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내세에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꿈같이 일이었다.
때문에 온갖 고문에도 천주교인임을 자인하며 순교의 대열에 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했던 것이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조선만은 명분과 매달려 성리학을 붙들고 대문을 꼭꼭 잠근 채 은둔하고 있었다.
외척 세력을 물리친 대원군이 양반세력을 누르고 민생과 국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 개혁과 신분제를 철폐 등의 시급한 민생개혁은, 태생적인 한계와 지지세력 부족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대원군은 오히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고자 했던 계획까지 프랑스 신부들이 제때 만나러 오지 않으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1만 여명이 순교하는 병인박해로 이어진다.
만일, 제때 프랑스 주교들이 만나러 왔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역사의 가정은 늘 서글프고 아쉽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집권 세력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던 측면이 강하다.
또한, 외국의 개방 압력에 따른 집권 위기는 황사영 등이 외국의 무력에 의지하려는 무리한 시도에 의해 더 큰 탄압을 불러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1889년에 프랑스와 수교를 맺으면서 103년 만에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 때는 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난 후였다.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천주를 믿으며 올곧게 살다가 천주의 품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백성들의 소박한 꿈은 《척사윤음》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반박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잘 나타나 있다.
대들보 같은 나무토막을 떨어뜨려 두개골이 부서지게 하여 죽이거나 큰 구덩이를 파고 교인들을 던져 넣어 생매장했던 순교의 현장들을 돌아볼 때는 종교적인 신념과 무관하게 그 누구인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러운 일부 교회와 종교인들을 보면서 저자는 묻는다.
순교자들이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연하게 죽음을 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것은,
조선은 그들을 버렸을지라도 천주는 영원히 안식케 하리라는 굳은 신념 때문이다.
“네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느냐?”
“이 세상에서는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