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작동
글쓴이: Alex의 그냥 뭐 살다보니 사회과학 | 2012.04.25
그야 당연하겠지만 수유너머 출신들이 쓴 책에는 일관된 색깔이 있다. 기존 좌파운동의 한계가뚜렷한 지점을 등지며 논의를 시작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점진적이나 결단코 질적인 변신을 요구하고, 그 '뉴타입'들이 전진한 데까지만이 해방구임을 겸손하게 시인하며, 그러한 변신에 있어 최고의 방편이 코뮌이라 권한다. "코뮌을 만들자" 이 메시지는 감히 Intel Inside나 Just Do it, Impossible is Nothing의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메이드인 수유너머라는 어떤 도장이라고 해야 하나.
수유너머 구성원들이 촛불시위와 월스트리트 점거시위가 터졌을때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이 간다. 두 사건에 대해 수유너머에서 유독 통찰력 있는 멋진 분석들을 내놓는게 그닥 놀랄 일도 아니다. 특히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08년 당시는 물론이고 아무튼 입 가진 사람은 한마디씩 해야하는 상황이라 관련 출판물이며 글이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촛불에 대해 심하게 간 어떤 감상은 무려 대우주의 섭리까지 치달을 기세였던 데 반해)여기서의 분석이 가장 뛰어나고 성숙했다.
이 책으로 푸코 용어의 여러가지 쓰임에 노출되어 푸코를 쉽게 소개받을 수 있다는 건 덤이다. 한 철학자를 순전히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한다는 건 너무 어렵다. 별도의 필요가 간절하지 않으면 그 난해한 한국말들을 무슨 엄두로 씹어 삼킬까. 헌데 이 책으로 말미암아 어렴풋이 푸코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나와 대중을 늘상 구분하여, 속고만 사는 대중을 가엾게 여기기도 하고 한없이 원망하기도 하면서, 선거철마다 매번 절망하여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좀 더 당해봐야 해"밖에 없는 마당에 대중과 함께 통치하는 언젠가를 꿈꾸는 아주 복잡한 처지라면, 입맛이 쓰더라도 푸코에게 귀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새삼 우리 논의의 스펙트럼이, 양쪽 극단 그 어느쪽에 가까워 있든 결국엔 근대라는 거대한 반구 안에 갇혀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사형폐지 찬반논쟁의 대립각이 얼마나 첨예하든, 그 안에서 냉정과 합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든 '사법' '규율' '통치' 권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관념틀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래는 사형폐지 찬반론에 생명을 주는 핵심은 '휴머니즘적 진보관'이 아님을 강하게 단언하고 있다.
일회적인 행사처럼 진행되는 처벌은 범죄의 사회적 영향에 비해 과잉 처벌이 되었고, 따라서 범죄 예방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반면 권력경제적으로 효과적인 처벌은 예방에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면 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완화된 처벌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휴머니즘적 진보를 이룬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 휴머니즘적 진보를 위해 형벌이 부드러워진 것이 아니다. 휴머니즘적 진보관은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해 사실상 무력한 사유방식이다. - 64p
다른 건 모르겠지만 사형폐지 찬반논쟁과 관련해서 (보통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휴머니즘 전술이 반대파를 극복하는데 여태껏 무력해온 건 사실인 것 같다. 제아무리 휴머니즘적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임해봤자, "네 가족이 똑같이 죽어도 그 따위 소리 할 수 있을것 같냐"는 주장에 번번이 격파당한다. 후자는 공공의 감수성을 격렬하게 휘젓는 강력한 야성을 가진 덕이다. 오히려 "세금으로 악당들의 밥을 먹일 순 없다"를 상대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전선은 그리하여 "사형이 범죄예방에 과연 효과가 있는가"의 진위를 가리는 것으로 흔히 이동하는데, 통계자료를 가지고 맞붙을 재주가 없는 일반인들의 논쟁은 여기서 대개 시켜놓은 술이 함께 동남과 함께 종료된다.
어떤 형사재판에서 배심원을 꾸리면서 가해자 관련인 피해자 관련인을 집어넣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사형폐지문제를 법적으로 결판내는 위원회 역시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서라도 살인사건에 가해자 입장 혹은 피해자 입장으로 연루되었을 사람을 배제해야만(사돈의 팔촌까지 훑는데야 어렵겠지만) 다수가 그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하기 쉬울 것이다. 그때도 역시 주요 전선은 "형벌 경제성의 원리" 위에 그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을 쥐고 그 다음을 상상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런 식의 효용이 완전히 가치중립적인 수학공식에서 구해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치경제학 역시 몰역사적인 학문이 아니며, 특정 시대의 산물인 의도를 역시 특정 시대의 산물인 합리성으로 포장한 결과일 뿐이다. 피해자의 처참한 죽음에 분노하는데 더 무게를 둘 것인가, 오판 가능성이나 수형자 교정(이건 또 얼마나 근대적인 말인지)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에 따라 효용 계산은 틀림없이 좌우된다. 그렇다면 이때 다시 휴머니즘적 진보 사상이 어떤 역할이라도 하러 되돌아 올게 아닌가? 이거야말로 기승전뇨롱.... 탈근대라는 말이 일세를 풍미하고도 유행이 다해 촌스러워진지 한참이 되었다. 하지만 사형을 둘러싼 논의의 면면을 보면 그 사이 근대에 대체 무슨 흠집이나 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근대는 결단코 견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