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좌파여, 올 봄엔 클래식을

글쓴이: 이번 생의 인연 | 2012.04.18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1. 봄에는 어떤 눈물을

 

 

 

 

봄. 봄바람. 봄비. 봄처녀...


 


 


 


사실 그렇다. 불혹을 지난 여자에게 봄은 어떤 의미인가. 활짝 핀 벚꽃은 무슨 의미인가. 흐드러진다는 건 어떤 심경인가. 언젠가부터 해마다 봄이면 이 느낌을 설명해보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해석은 그때마다 틀렸고 꽃이 피는 이유만큼 지는 이유가 존재했다. 즉, 그때 봄에 처한 내 상황에 맞추어 꽃도 피고 봄도 가고 그랬던 것이다. 봄뿐만 아니라 의미부여하기 참 좋은 가을이나 겨울도 늘 그래왔던 것 같다. 계절이 아무리 네 가지 스타일이라 해도 한 사람에게 있어 계절은 그가 살아온 나이만큼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


 


 


 

요즘 들어 발견한 봄의 심상은 두려움이다. 지난날의 이별, 잦은 실수, 뜻밖의 시련, 이런 것들이 생각날까봐 나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꽃구경 가자는 말이 꼭 돌아오기 힘든 어디 먼 곳에 가자는 말로 들린다. 왜 그럴까. 사람의 뇌에 축적된 데이터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잘 정돈된 서랍처럼 생겨 먹진 않은 것 같다. 뇌 과학 같은 건 한 글자도 공부해보지 못한 내 방식대로 뇌 스캔을 해보자면 계절의 데이터는 내가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난립된 융합의 창고이다. 이 데이터들은 진화와 쇠퇴를 반복하면서 한 인간의 성장과 추락에 조용히 기여한다. 각 데이터들 간의 비교우위를 논하고 싶지만 인간은 한 곳에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정된 함수를 가지진 않는다. 예를 들어 올 봄에는 벚꽃을 보고 20년 전 헤어진 사람을 떠올릴 수 있지만 작년 봄에는 그때 만나던 사랑에 더 집착했을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나이가 들어가면 축적된 데이터와 그 데이터가 등장해 해당 계절을 지배했던 2차 데이터가 증가하고 그것들은 다음 계절을 맞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발전한다. 매해 봄마다 느꼈던 소회가 똑같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 총량의 무게로 인해 - 데이터의 사용양의 증가로 인해 - 감성의 깊이가 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데이터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알 수 없는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소실되기를 바라는 시점이 온다. 나는 그 시기가 어떤 특정 계절을 같은 방식으로 견뎌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것을 보게 될 때가 아닐까 한다. 지난 봄에 보지 못했던 나무, 지난 봄비에 맞아 보지 못했던 바람, 지난 벚꽃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 혹은 슬픔. 계절은 나를 보기 좋게 통과하는 것 같아도 나 또한 계절에 그다지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봄을 걸어가며 제대로 느낀다.


 


 


 

이번 봄에 나는 흘러가는 음악의 가사 한 줄에도 폐부가 찔릴까봐 노래하지 않고 연주하는 음악만 들었다. 주로 뉴에이지풍의 피아노곡과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가사가 없는 음악은 책을 읽을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집중력에 많은 도움이 된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무잡념의 시간은 나같이 생각 많고 머리 복잡한 사람에게 영원한 이상향이다. 지난날 적지 않은 세월을 성과위주의 삶을 살아왔기에 아직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일들은 해치우지 않고선 맘 편히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숙제를 끝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나는 늘 지금 말고 다음 과제를 질문하여 생을 달려왔다. 그렇게 달리다만 보면 스스로 멈추고 싶어도 관성에 의해 자기 몸이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결국 나는 천천히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절벽너머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속 달리면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잠시 멈추는 법, 멈추고 쉬는 법, 쉬면서 계획하지 않는 법,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이런 것들을 몰라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을 모르고 자신을 소모하는 인생밖에 더 되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이다.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무언가 삶을 리셋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아니 잠시라도 소모된 내 인생에 평화의 휴식을 제공하고 싶다면 클래식을 듣기를 권한다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오랜 세월 클래식 방송을 해왔던 평론가와 연주가, 방송인들의 이야기이다. 클래식 전문 방송 'KBS클래식 FM' 개국 33주년 기념도서이기도 하다. 93.1을 자주 즐겨 들었다면 7명의 저자들이 익숙할 것이다. 언젠가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였다. 무심코 맞춰놓은 라디오에서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반포대교 건너 올림픽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평균속도 20km로 주행하고 있었다. 와이퍼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내쳐지는 빗물도 덩달아 격해지고 있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빗물이 앞을 가리는 것인지 눈물로 시야가 흐려진 탓인지 운전을 더 하기가 힘들어 졌을 때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리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금 뚫려진 도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감성을 건드렸던 음악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인지 알지 못했다. <당신의 밤과 음악>을 진행하는 이미선 아나운서는 출연자들 중 송창식의 이야기를 하며 이 노래를 회상했다. 성악가 지망생이었던 송창식이 선생님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중간에 성악을 포기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테너 베냐미노 질리의 목소리를 꼭 빼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작년인가 놀러와에서 쎄시봉 특집에 송창식이 조영남과 이 노래 앞 소절을 부른 기억이 난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다시 노래를 들어보았다. 아무일 없었지만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남 몰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 있는 분들게 추천하고 싶다.


 


 


 


 


#2. 오늘은 어떤 음악을


 


 


 


 

이 책의 저자들은 하나같이 일상에서 클래식을 듣다 보면 삶이 풍요로와지고 행복해진다 주장한다. 또 클래식이 어느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젠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며 한곡이라도 집중해서 들어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다 점점 문학이나 미술 등의 인접장르 속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껴보라 말한다. 음향기기에 집착하거나 특정 연주가 한사람에게만 몰두하거나 특정 작곡가만 찾아서 듣는 것도 나름의 클래식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전한다. ‘클라시쿠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 로마에서 시민 계급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최상급을 지칭하는 계급용어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클라시쿠스는 최고의 계층이 아니라 일상에서 클래식과 동행하는 사람, 클래식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일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클래식을 대중가요보다 더 우선시 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클래식 연합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그땐 다른 대학교 선배들이 술 사주고 영화 보여 준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들은 확실한 부르조아였다. 당시 그 나이 대 - 정신이 제대로 박힌 ㅋ - 선배들이라면 대부분 민주화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 선배들은 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의 달달한 자켓을 입고 머리엔 무스를 바른 채 아버지 자가용을 끌고 다녔다. 우린 철없게도 그 선배들이 예매하는 영화를 좋다며 졸졸 따라다니며 무료 관람했고 이 나라의 오렌지족 문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때 우린 매주 한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그 작곡가의 일생을 토론하고 끝나고 나면 신나게 호프집에 가서 건배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 -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OST 로 유명 -, 드보르작의 교향곡,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이런 곡들이다. 이 책에서도 클래식 동아리 활동을 한 저자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클래식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클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택한 하나의 예술적 표상이 맞다고 확신한다. 적어도 당시 지방에서 부모님이 소 팔아 보내주신 돈으로 학교를 다니며 오월의 축제기간에도 공부를 하던 선배들은 클래식 같은 건 듣지 않았다. 그때 동아리 선배들이 지금 이 나라 클래식계의 주류가 되었는데 이제와 우린 부르조아가 아니다 말하는 건 명백한 위선이라는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분위기속에서 클래식을 들어왔고 전공이나 취미가 음악이었고 직업까지 이어졌다면 대부분 모범생의 길을 걸어왔거나 보수, 우파 일 확률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이건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좌파가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좌파는 클래식을추구하는 성향과 정치적인 진보의 자세간에 괴리감을 많이 느낀다. 클래식은 귀족과 모범생, 격식과 예절, 보수와 기득권, 안정, 교양, 불변등의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역사속에서 노동과 혁명은 전복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클래식과는 상반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에서 더욱 미적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경쟁과 계산중심의 자본주의에서는 그야말로 특정 계층만 진정한 휴식이 가능한 것 아닐까. 사회주의에선 다 같이 같은 신분으로 놀이를 향유하고 서로가 교감하며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와 정치적 관점이 아닌 삶의 가치관과 꿈꾸는 방식으로 보자면 클래식은 외려 좌파에 어울려야 맞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저자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체와 주장을 피력한 사람은 유정아였다. 방송인 유정아는 클래식의 속성이야말로 ‘혁명적’이라 주장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꿈이 테너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기존의 것을 지키고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견디거나 혁신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즉, 음악을 듣는 행태는 보수적일지 모르나 그 청취를 통해 내 몸속에 들어온 음악은 나와 세상을 바꾸는 적혈구가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은 자신의 삶을 지켜줄 절대자에게 바치거나 노동의 힘겨움을 잊기 위한 의식에서 생겨났다. 작곡가는 음악이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교회나 왕, 귀족을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클래식을 상류층이 즐겨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작곡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흡이 그들의 삶과 음악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클래식 말고도 다른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시대적 환경과 변화에 따라 취향도 다양해졌을 뿐인 것이다. 내 생각에 클래식은 다른 음악보다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음악의 근원적인 보편성을 자기 본질로 획득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이 클래식의 장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들음으로써 과연 내안에서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냐 인 듯하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클래식을 듣는 방식 또한 다양할 것이다. 요즘은 클래식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어플도 다양하고 손쉬운 음원서비스도 많아 공연예술의 높은 문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다. 혁명하고 싶으면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거창하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도 주체없이 눈물이 흐르고 마는 이 내 한 몸에 쏟아지는 저 처연한 계절을 견디기 위한 백신으로서라도 클래식은 아주 좋은 적혈구 주사가 되어 줄 것이다. 나처럼 봄이 시리고 아직도 겨울 옷을 벗지 못한 많은 분들과 이 책에서 소개하는 추천곡을 같이 듣고 싶다. 오늘만은 행복한 클라시쿠스로 살자.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그 다음 날엔 또 그날의 오늘로...


 


 


 


꽃미남 연주자들로만 구성된 눈이 즐거워지는 연주다.
피아니스트 지용과 비올라의 용재 오닐의 표정에서


애절함을 느껴보자.

 

<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Op.114 '송어' 4악장 - 2010 디토 페스티벌 실황 中 >


 


앙상블 디토


바이올린 - 스테판 피 재키브


첼로 - 마이클 니콜라스


비올라 - 리처드 용재 오닐


더블베이스 - 다쑨 장


피아노 - 지용


 


 


 


 

전체목록보기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