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역사서라는 이름이 걸맞는 사기는 사마천(BC145 ~ 약90년)이 완성한 것으로 전설시대의 제왕들인 오제로부터 자신의 당대인 한무제까지 무려 삼천년의 역사를 다룬 통사이다.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따서 기전이라 부르며 동양 역사저술의 기본체제가 되었다. 이중 본기(12권)는 제왕의 기록이나 <항우본기>와 <여태후본기>는 제왕이 아니어도 천하형세를 장악한 주체라면 본기에 편입시키는 사마천의 진보적 사관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스무살을 전후하여 천하를 주유하면서 역사현장을 답사하며 유물, 구전과 전승까지 역사서에 담는 성실함을 보였다. 사마천을 본받아 역자인 김영수도 사기의 현장을 찾아 15년 넘게 100여차례 사기의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현장감있는 사진과 지도를 첨부하는 열정으로 읽기 어렵다는 완역사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사마천이 임안에게 쓰는 편지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라며 죽음보다 더한 굴욕인 궁형을 받고 사기를 쓰는 피끓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본책은 사기의 서문에 해당하는 보임안서와 태사공자서를 앞에 두고 본기 중 제1권인 오제본기에서 제5권인 진본기까지 담고 있다.
사기의 첫편인 <오제본기>는 전설시대의 다섯 제왕들의 덕을 기린 것으로 사마천은 현장답사를 통해서 복희와 신농은 역사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덕과 수양이 부족하면 자식이 아니라 더 훌륭한 인재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선양'의 미덕을 찬양하며 덕치를 갈망하는 백성들의 염원을 반영시켰다. 순이 형법을 세우고 법에 따라 형벌을 내렸는데 죄를 지은 자는 처벌을 낮추었으며 고의가 아닌 과실은 사면하고 법과 형벌은 신중하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쓰면서 자신이 이릉의 화로 인해 궁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 분루를 삼키며 요순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오제본기에는 상고시대 동이족 부락의 수령으로 각종 병기의 발명자로 전하는 치우와의 탁록전투에서 황제가 승리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의 상징이 치우천왕이 언급된 것이 눈길을 끈다.
<하본기>는 오제의 마지막 임금인 우 임금이 치수사업을 완료하고 구주의 통치구역을 확정하였는데 이것이 천하이자 중국의 개념이 되었다. 우가 죽고 '선양'의 전통에 따라 익이 대권을 물려받았으나 우의 아들 계가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부자계승을 기조로 하는 권력 승계방식이 자리를 잡았으니 덕보다 무력이 앞서는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은본기>는 갑골의 발견과 은나라의 마지막 수도 은허의 발굴로 전설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사료적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다. 사마천은 나라의 흥쇠가 덕정의 유무와 관련있음을 표출하면서 개국군주 탕을 하나라의 걸의 폭정과 대비시켜 하의 멸망과 은의 개국의 당위성을 말한다. 이후 적자계승이 무너지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들이 다투면서 혼란이 계속되다가 주가 달기를 총애하며 주지육림에 빠지고 포락이라는 잔인한 형벌로 신하들과 백성들을 탄압하더니 결국 주의 문왕 서백의 아들인 무왕에게 패했다. 사마천은 포악한 군주들의 사례를 부각시키며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의 기용을 통한 현인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본기>는 서주와 춘추전국시대까지를 포함하는 800년 주나라의 역사이며 무왕까지는 선조들의 덕행으로 왕조가 건국되고 융족의 침입으로 쇠퇴하다가 평왕이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춘추전국시대에 결국 서북방의 진(秦)이 전국을 통일하는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주 왕조는 적장자 계승원칙에 입각하여 천자 - 제후 - 경대부 - 사로 이루어진 신분구조로 강상윤리를 일상에까지 깊이 심어 정치와 문화를 통합하려 했으며 인척이나 공신들을 지방에 봉하여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점차 결속력이 약화되며 춘추시대가 도래하였다. 기원전 249년 진의 장양왕에게 동주가 멸망당함으로 주나라가 막을 내렸다.
<진본기>중국 고대사의 가장 큰 기준이되는 BC 221년 최초의 통일대업을 이룬 진의 역사이나 진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분서갱유로 문화와 사상을 탄압했다하여 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마천은 천하대세를 좌우한 나라나 인물은 본기에 편입시키는 큰 원칙을 고수하였다. 고유한 상무정신과 인재정책에서의 개방성과 포용성및 실질과 공리를 중시한 문화풍토가 통일이란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신분, 국적, 종족, 나이를 따지지 않는 '사불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진왕 정은 중국역사 최초로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을 시황제로 부르게 하였으나 그가 죽은 지 삼년만에 진은 망하였으며, <진시황본기>로 이어진다.
사마천은 오제의 시작인 황제를 요, 순, 하, 은, 주 삼대의 시조로 하는 계보를 완성시켜 '대일통'의 중화주의의 수립을 위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진시황에 이르러 천하가 통일되며 대일통을 확립했다는 역사관을 세웠다. 중국은 1996년 5월 '국가 95중점연구'로 '하상주단대공정'을 시작하면서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070년으로 확정하였으며 '동북공정'도 그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은 56개의 다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개방에 따른 소수민족의 동요와 민심이완을 막고 한족 중심의 역사관 확립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역사정책에 사기가 이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기원전 108년 서한 무제시대에 주변 소수민족에 대한 무력통합정책의 일환으로 고조선이 멸망되었는데 지금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가 가시화되고 있으니 과거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상고사에 대한 연구와 근거가 있는건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