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보았던 데미안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너무 강렬해서 "데미안"을 떠올리면 악마의 속삭임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하곤 했다. 싱클레어의 어린시절의 내용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기억이 있다. 왜 뒷부분은 생각나지 않을까, 한참 고민을 하다 성인이 되서 펼쳐본 데미안은 또다른 세계를 담고 있었다.
데미안이 왜 중학생 필독도서일까. 그 의미를 중학생때가 아닌 성인이 되서야 깨닫게 되었다. 데미안은 '나'로 칭해지는 에밀 싱클레어의 자전적 이야기로 어린시절부터 청년때까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종교와 더불어 철학적 의미가 잘 함축되어진 이 책은 학문적으로 볼 때는 분석하는 재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한 아이의 자전적 이야기로서 볼 땐 "사춘기"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때 읽었던 느낌과 성인이 되서 읽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독도서로서라도 데미안을 잘 읽었다고 생각된다.
학생시절에 읽는 데미안은 '싱클레어'시점으로 살펴보게 된다. 자신이 사춘기가 오는 시점이기 때문에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사춘기의 느낌, 주변 친구들과 환경에 대한 느낌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데미안을 친구로서 생각하게 되고,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가깝게 느끼면 느낄수록 나 자신도 데미안을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속삭임'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성인이 되서 읽는 데미안은 1인칭적인 시점이 아닌 제3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나 자신이 성인이기 때문에 그때를 회상하게 되면서 읽는 것이다. 거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합쳐지면서 학문적인 연관성을 살펴보기도 하고, 종교적인 관점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게 만든다. 데미안의 존재는 그만큼 멀어지지만,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도록 도와준 하나의 표지로서 그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에밀 싱클레어가 헤르만 헤세의 필명이었다는 걸 안다면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부모가 되어 자식이 있더라면, 또 다르게 읽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싱클레어가 겪은 어른이 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은 그 누구라도 겪는 것이겠지만, 주변에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데미안'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데미안이 악이던 선이던 그 무엇이던, 싱클레어가 자신도 모르게 의지했던 것처럼, 나 자신을 알아주고 나 자신을 알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그런 존재가 내 주변에 있는가,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