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몽골 하면 넓은 초원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까지나 목가적인 환경만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곤,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한 몽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칭기스칸으로 대변되는 대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8백년전 아시아에서 유럽에 걸쳐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하였던 제국, 유럽 근대의 불씨를 심어준 바로 그 제국에 대해서, 그렇지만 지금은 기억 속으로 사라진 제국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그런 제국을 건설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들은 어쩌면 광활한 초원에서 자랐기에, 조드를 피해 유랑하는 유목민이었기에, 그런 땅을 통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 제국의 서사를 읽으면서 얼핏 고구려가 생각나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서인지, 아님 아쉬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초원이 얼마나 넓은지는 상상이 되지 않지만, 작가가 쓴 그 깊음, 그리고 넓음에서 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읽는다. ‘하늘에서 떨어진 조그만 연못 하나가 자라서 아주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얼마나 큰지, 둘레를 돌아보겠다는 사람은 있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웅덩이의 길이보다 인간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다. 웅덩이를 빠져 나가는 길은 한줄기 밖에 없으니, 대부분의 물방울은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호수에는 맑은 물이 항상 넘쳐나도 훔쳐가거나 더럽히는 사람이 없었다. 호수를 어지럽히기에는 인간의 세상이 너무 작았다.’ 팩션을 읽으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맛은,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나도 역사 속으로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신화를, 전설을 내가 직접 듣고, 본 것 마냥..
[조드]는 테무진이 초원을 누비며 몽골의 칭기스칸이 되기까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백성들을 잃고,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쫓기면서도 보르칸산의 전설을 잃지 않았던 사내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놔버리고 푸른 하늘의 뜻을 쫓고자 하는 테무진은, 말 그대로 태초에 있던 것, 가장 큰 것, 근원이 되는 것, 푸른 하늘의 육체인 것, 대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바다, 바로 칭기스 이었다.
메르키드족 왕자의 정혼녀였던 후엘룬을 납치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은 예수게이, 그렇게 하여 테무진은 태어났지만,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는 복수를 꿈꾸는 메르키드족에게 잡혀 족장의 아내가 된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그리고 아버지 예수게이의 의형제였던 토오릴 칸과 3자 동맹을 맺고, 그런 자신의 아내를 되 찾는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의붓아들이 어머니를 취하여 여자와 자식들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라 하지만, 유목민들의 생활풍습 속에서 가슴 시려하는 여인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버르테 역시 메르키드 족장의 아들을 낳고, 테무진은 주치라 이름 짓고 받아 들였지만, 그녀의 가슴엔 멍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주치는 테무진, 아니 버르테의 아들이기 보다 후엘룬의 손자가 되었다. 8백년전 몽골의 서사를 읽으면서 우리 전통사회에서 나타났던 일들을 발견하고, 인간의 역사란 그것이 농경민인지, 유목민인지를 떠나서 동일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이 책 [조드]가 아시아의 중세를 그리는 또 하나의 역사서가 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으며 자연을 나눠 가졌던 그들에게 조드는 바로 재앙 그 자체이었다. 초원에 물이 없어서 가축들이 죽어 나가고, 초지의 뿌리까지 말라버리는 재난은 인간들을 자연에 순응하게 만들지를 못하였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상대가 가진 것을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초원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갔고, 뺏고 빼앗기는 약탈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는다.
늑대 족의 사내와 사슴 족의 처녀가 숨어들었던 산, 외눈박이 형제가 기마족장의 딸 알랑고아를 훔쳐 숨어든 산, 그 산 보르칸산에서 시작된 어린 몽골의 전설은 이제 테무진과 자무카의 앞날을 갈라놓고 있다. 그들은 잿빛의 푸른 늑대 족이 사는 나라를 일군 보돈차르 몽학의 황금가문에 속한 똑 같은 유목민이지만, 적자로 계승되어 흰 뼈라 불리는 테무진과, 족외인으로 가문에 합류하여 검은 뼈라 불리는 자무카 사이에는 형제의 우정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신분제에 따르는 갈등이 숨어 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이 흰뼈라는 황금가문이면서도 귀족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테무진, 그에게 백성은 가족 그 자체였다. 칸의 규율은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지 못했고, 조드의 혹한은 종이나 일반 백성이나 테무진에게도 똑같이 매서웠다. 그러나 더 용감했고, 더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검은뼈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논공행상에서 밀렸던 자무카에게, 귀족은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반 백성과 비교할 때는 그 역시 귀족이었다. ‘세상에는 세가지 빈 것이 있어. 하나는 꿈이지. 꿈은 붙잡아도 놓아도 빈 것. 또 하나는 신기루인데, 어슴푸레 나타나 사막을 덮지만 모두 빈 것이야. 소리쳐도 외쳐도 메아리 역시 빈 것, 잡을 수 없지.’ 자무카가 옹칸의 아들 셈궁에게 반역을 부추기면서 한말 이지만, 자신에게 한말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꿈이고, 신기루이고 메아리라고.. 그것이 테무진 때문이었을까?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던 자무카가 테무진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 그런 자무카의 모습을 보면서 전통시대, 아니 현대에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저자는 인류가 근대를 환멸 하기 시작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그것에 대체할 그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찾은 것이 광야의 중세를 그리는 것 이었다고 한다. 가톨릭과 비가톨릭이 각축하는 성곽 대신, 이동문명과 정착문명이 충돌하는 초원의 이야기에서 현재에 부합하는 인간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초원에 버려진 한 소년의 파란만장한 생존투쟁을 통하여, 당시 정착민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엎어버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자연에 순응하며 살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다. 1,2권 전(全)권을 통하여 흐르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더 이상 아름답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다음 이야기, 테무진이 칸이 되고부터 죽을 때까지, 어떤 이야기들이, 어떻게 그려질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