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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미술비평은 과연 색다르다

글쓴이: 자하님의 블로그 | 201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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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고려대학교출판부, 2010)는 20세기 초현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한 푸코의 비평이다. 예술의 미적 체험보다는 인식론적 체험에 중점을 둔 미술비평이라 하겠다. 푸코는 이 책에서 근대 서양회화를 지배했던 유사성에 근거한 재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동시에 인식론 입장에서 현상학의 의도성을 비판하면서 인식론의 내재성으로의 전향을 강조한다. 참고로 푸코의 미술비평은 1968년에 발표한(1973년에 출판된)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한 논평과 1966년도 《말과 사물》 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논평이 유일하다. 1990년대 초에 김현 선생이 푸코의 마그리트와 벨라스케스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마네에 대한 푸코의 견해를 유추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통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그리트는 마네, 칸딘스키, 클레로 이어지는 현대 회화의 극단적인 모험과 관련되어 있다.


 


푸코의 마그리트론은 《말과 사물》의 개념틀 내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면 된다. 《말과 사물》은 푸코의 인식론 비평의 청사진을 조명한 책이기에 마그리트가 이 책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푸코는 여기서 네 가지 에피스테메의 변천사를 조명하는데, 전고전적 에피스테메(유사와 조응),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재현), 현대적 에피스테메(역사), 동시대적 에피스테메(구조주의)이다. 현대 미술가들은 이런저런 에피스테메와 연관되는데, 가령 벨라스케스는 재현의 에피스테메, 마그리트는 구조의 에피스테메, 마네는 역사의 에피스테메에 해당한다. 그런데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는 좀더 느슨하게 15세기 이후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서양 회화의 기제를 두 가지 원칙으로 정리한다. 첫번째 원칙은 조형적 재현이고, 두번째 원칙은 유사성이다. 푸코가 보기에, 파울 클레가 기호화된 형태를 배치하여 조형적 재현을 파괴하고, 칸딘스키가 유사성에 바탕을 둔 재현을 거부한다면, 마그리트는 탈재현적이고 비확언적인 그림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미술의 긴밀한 인접성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푸코의 마그리트론 또한 미술의 '보기'와 문학의 '말하기'에 관한 인식론을 담지하고 있다. 마치 레이몽 루셀의 '뒤집어진 문체'처럼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보여준 칼리그람도 은밀하게 같은 말들로 두 개의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즉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인식의 이중적인 운동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잠시 들뢰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식은 '지식존재' 혹은 '권력존재'이다. 푸코는 자신이 받은 마그리트의 편지 두 통을 게재하는데 1966년 6월 4일자 편지에서 마그리트가 밝힌 레이몽 루셀에 대한 평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즉 루셀과 마그리트의 예술적 상상은 환상세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세계를 일깨우려는 예술적 실험이고, 그 과정에서 경험과 이성에 근거한 재현의 이데올로기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이제 푸코는 현대회화를 놓고 지식과 경험의 문제를 탐구한 예술철학자로 재조명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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