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고르라면 아마도 인생을 초콜릿 상자에 비유한 것일게다.
'삶은 초콜릿이 들어 있는 상자와 같아서 처음에 맛있는 것만 골라먹으면 맛 없는 것만 남고 말아...' 이것 말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더니 그 검프의 현명한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도 있는 것 같다. 그게 바로 미스터리 분야다. 나는 이른바 1940년대 이전의 클래식 미스터리의 황금기적 대가들은 우리나라에 거의 다 소개된 줄 알았다. 그렇게 그 시기엔 맛없는 초콜릿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아직도 여전히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상당히 맛있는 초콜릿이!!
그 초콜릿이 바로 나이오 마시다.
얼른 일본 사람 같은 느낌이 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뉴질랜드 태생의 어엿한 영국인 여성 작가다. 놀라운 것은 도로시 세이어즈,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과 더불어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4대 여왕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 정도 위치에까지 오른 작가인데 왜 이리 생소하기만 한 것일까? 다시 한 번 국내 미스터리의 폭이 좁음을 느끼게 된다. 같은 여왕중 하나인 마저리 앨링엄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라서 더더욱. 그러니까 아직도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사실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초콜릿 상자 자체가 작았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현실이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지금 나이오 마시가 소개된 것 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가진 초콜릿 상자도 일본 못지않게 더없이 커질 수 있기를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소망해 본다.
아무튼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게 된 것은 그녀의 1939년도 작품 '죽음의 전주곡'이 국내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이 조금 흔들려서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는데 보라색 띠지에 '애거서 크리스티 보다 더 뛰어나다'는 뉴욕타임즈의 평가가 쓰여 있다. 사실 이 말이야 말로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죽음의 전주곡을 들춰보게 된 동기가 되었는데 1939년엔 아시다시피 현재까지도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로 손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뉴욕타임즈가 단순히 그 둘을 비교해서 쓴 말은 아닐테지만 두 작품이 나란히 출간된 것이 1939년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어쩐지 이 문구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알고 보니 나이오 마시와 애거서 크리스티는 같이 콜린스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콜린스 크라임 클럽의 간판스타들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둘은 라이벌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띠지의 타임즈 글도 그 관계를 익히 대중들이 알고 있기에 그렇게 써 놓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가진 특유의 연극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건 나이오 마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일까? 더구나 같은 해에 나온 '죽음의 전주곡'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공교롭게도 결말 묘사에 있어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묘하게 더욱 의혹을 가지게 한다.
아무튼 곁가지의 이야기들은 이쯤하고 작품으로 들어가려 한다.
공간적 배경은 펜쿠쿠라는 조용한 작은 시골이다. 애거스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에 흔히 나왔던 배경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 1939년에 이 배경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가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1939년 유럽엔 더 이상 이런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1939년은 유럽이 거대한 불길로 곧장 뛰어들고 있는 해였다. 다름 아니라 그 해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커다란 비극을 낳았던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읽어야만 왜 애거서가 그런 플롯으로 만들었는지 더 잘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시대의 공기에 예민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전쟁의 기운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비극을 작품 속에 투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배경으로 했던 섬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애거서에게 있어서 그 섬은 그대로 유럽의 은유였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법망을 교묘히 빠져 달아났던 죄인들이 모이게 된다. 그들은 그대로 저마다 속내를 감추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의인화된 모습이었고 그들 하나 하나는 인디언 인형의 노래에 따라 말그대로 처형되게 된다. 여기서 인디형 인형은 유럽 자체가 오랜 제국주의로 식민지 수탈에 의해 성립된 유죄의 유산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때문에 사실 처형자의 존재란 그가 가진 직업까지 더해 장차 비밀과 유전된 죄를 가지고 있는 유럽 자체에 처벌을 내릴 신적 존재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벤야민이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서 보고 있었던 것을 애거서는 미스터리로 형상화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한 내 해석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또 믿지 못하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작품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설사 애거서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르트에 의해 저자의 죽음이 선언된 이후로 뭐 데리다까지는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저자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하는 것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이지 않은가? 그러니 작품은 미스터리에 있어서 탐정의 해결과도 똑같아서 그 해석이 나름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면 그렇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율리시즈를 썼을 때 제임스 조이스가 했던 말 그대로 작품이란 오히려 기존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더 생명을 얻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해석에 대한 내 개인적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다면 같은 해에 나온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가 배경으로 삼은 그 작은 마을도 역시 애거서의 섬과 같은 존재일까?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여섯 명도?
개인적으로는 확답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알레고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위기도 다르다. 애거서의 그 작품이 공포가 기반이 된 음침한 연극에 가깝다면 나이오 마시의 '죽음의 전주곡'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스타일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한바탕 벌이는 통속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띠지의 뉴욕타임즈 말대로 나이오 마시가 애거서 보다 더 뛰어난 점이 정말 있음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캐릭터를 빚어내는 솜씨이다. 이것은 정말, 한 작품만 보고 얘기하기에는 정말 무모하긴 하지만, 애거서 이상이다. 그녀의 붓 끝이 그려내는 캐릭터가 어찌나 생생한지 소설을 읽고 있지만 마치 눈 앞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정말로 나이오가 뛰어난 것은 상황마다 미묘하게 전개되는 등장 인물들이 가지는 감정의 흐름을 단번에 잡아내어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내게 그대로 그 장면 안에 들어간 듯 현장감을 주었는데 그래서 노처녀 둘이 서로 전주곡을 연주하겠다고 은밀하게 불꽃티는 공방전을 벌일 때는 박장대소까지 하게 만들었다. 앞서 한 편의 연극이란 말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이오 마시는 추리소설 만큼이나 연극에도 열정을 바친 사람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애거서 크리스티가 받았던 데임이란 작위까지 영국 여왕으로 부터 수여받았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인지 장면의 연출 또한 연극을 상연하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세밀하다. 일례로 내가 정말 감탄했던 부분을 한 번 소개해 본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이 해결해야 할 살인이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장면으로 살인으로 확 폭발되기까지 그 긴장을 응축시켜 나가는 솜씨가 그야말로 절묘하게 수놓아진 장면이다.
캠페뉼러 양(그녀가 희생자다.)이 가슴 부분을 한껏 끌어올리는 바람에 등이 훤이 드러났다. 그녀는 악보에 닿을 정도로 코를 바싹 들이대고 저음부터 왼손을 들렸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빰, 빰, 빰.
길게 인용하고 싶은데 길이상 짧게 인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이오 마시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 화음부가 울리기 전에 일단 캠페뉼러 양의 몸을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기대가 이제 촉발되는 순간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나이오 마시는 단순히 캠페뉼러 양의 심리를 전하려는게 아니라 긴장으로 응출될 소실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동작을 일부러 한껏 늘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등이 훤히 드러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카메라로 찍으면 클로즈 업되어 내면과 바깥의 공기가 여지없이 팽팽해지는 분위기로 연출될 것이다. 마치 풍선이 터지도록 바람이 들어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마이오는 바로 그녀를 악보쪽으로 기울이게 한다. 코를 바싹 들이대게 함으로써 몸을 한껏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시에 공기가 좁은 틈새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대기의 속도는 빠르게 되고 고양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작게 응축되면서 주위의 긴장도는 더 높아진다. 그리고 운명의 전주곡이 울린다. 마치 폭발을 위해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듯...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오는 이렇게 최고조의 긴장을 위해 정확히 시각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작가다. 그것도 군더더기 없이 딱 필요한 장면만을 몽타쥬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문학적 연출력과 연극적 연출력이 비등점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 작품의 이러한 뛰어남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생생한 묘사에다 질투와 원망 같은 생생한 인간의 감정이 더해져 '죽음의 전주곡'의 미스터리는 속도를 얻게된다. 전개의 빠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맞부딪히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감들이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애거서가 비밀로서 현 유럽을 드러냈다면 어쩌면 나이오는 질투와 원망으로서 현 유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 감정이 애거서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통하여 내린 유럽의 논평 처럼 나이오 마시가 내린 논평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헨리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드러나듯이, 또는 결정적으로 범죄를 결심하게 된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 그 질시와 원망이 소통 불가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 모두는 서로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만 바라보고 남들은 어떻게 볼지를 관심두지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편견의 시야들이 소문으로까지 확장되어 마을 전체에다 상처의 비수들을 던진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골몰하느라 타인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어떤 고통을 껴안고 있는지 보려하지 않는 이 펜쿠쿠의 모습이 바로 나이오 마시가 내렸던 당시 유럽에 대한 논평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탐정 역할을 하는, 그리고 나이오 마시가 평생에 걸쳐 써 온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수사관 앨린 경감이 자신의 단 하나 뿐인 연인인 트로이에게와의 연서(앨린이 트로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전작에 나온다고 한다.)에 담긴 내용이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다. 거기서 앨린이 보여주는 태도는 한결같다.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는 것. 아니, 사실 수사 자체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앨린이 늘 하듯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물의 입장이 되어 헤아려 보는 것. 결국 사랑으로 수사로 유일하게 소통의 노력을 보여주는 앨린은 사건을 해결하고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혼란스러웠던 펜쿠쿠에 다시금 질서를 가져다 준다. 아마 바로 이것이 나이오 마시가 현재 유럽에게 보내는 메세지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미지의 작가였지만 이 작품은 정말 의외의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말했던 바와도 같이 애거서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의 불안한 현재에 대해 나이오 마시만의 전언 또한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이오 마시의 대표작은 1935년에 나온 두 번째 작품 부터라고 하는데 '죽음의 전주곡' 때문에 한껏 고양된 그녀에 대한 기대로 인해 그 작품들 역시 모조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차후에 꼭 다시 만나게 되길 빈다. 그 때까지 오래도록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어야겠다. 나이오 마시라는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