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저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자. 1999년에 출간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펴낸 저자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생이었고, 그 또래가 대부분 그러하듯 반항기 가득한 아이 - 였지만 그 불만을 제대로 표출할 방법을 몰랐던 학생이었다. 얄팍한 지식으로 김경일 씨의 문제작을 읽었다. 다 맞는 말 같았다.
지금으로썬, 최준식의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의 내용이 나의 뇌 속에서 섞여, 어떤 내용인지도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거 참 옳은 말 시원하게 하네, 정도의 느낌은 남아 있는 책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나이 한 살에 따라 권력관계가 갈리는 한국사회를 경멸하며, 이러한 이상한 사회를 만든 책임은 상당 부분 유교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렀다. 21세기가 되었고, 우연히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2012년은 동양사상을 조금 공부해 볼까 폼만 자고 있던 찰나.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저자는 김. 경. 일. 맞았다. 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
2. 옥시덴탈리즘
서구가 동쪽 세계를 타자화시킨 결과가 오리엔탈리즘 - 이 용어를 대중화시킨 사이드에게는 특히 중동 - 이라면 동쪽이 서구에 맞서 자신을 타자화시킨 결과는 옥시덴탈리즘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동도서기나 일본의 화혼양재 중국의 중체서용이 그러하다. 물질문명에 열패감을 느낀 동쪽에서 자신의 정신만은 서구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태도.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옥시덴탈리즘을 여러 장소에서 접했다. 공교육 과정에서 역사나 윤리 등 주로 사회 교과목에서 지겹게 들었고, 공중파 방송에서 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접했다. 스포츠 경기에서 해설자는 '정신으로 버텨야 한다'고 외쳤고, 경기 뒤 이어진 인터뷰에서 선수는 '신체 조건에서 우리가 뒤져도, 정신만은 우리가 앞섰다'는 모법 답ㅂ안을 읊었다.
정말. 동양사상, 동양적 세계관은 정신문명 - 환경오염, 인간소외, 빈부격차, 제국주의를 낳은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의미의 - 일까? 자연과 합일을 강조하고, 인본주의에 기반하며, 공동체 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가르침인가. 그렇다면 서구가 침범하기 전, 영원한 어제의 나라였던 중국에서는 전쟁도, 양극화도, 인간소외도 없었어야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사회는 구리기 마련이라고, 지금과 똑같이 돈 때문에 다퉜고 강탈하며 죽였다.
3. 갑골문으로 파악한 동양사상의 시원, 생각 만큼 길지 않다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의 제목과 목차를 보고 예상한 책의 내용이 바로 그랬다. 동양사상은 인간사회에서 만들어진 세계관이고, 그렇기 때문에 구린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 이 책은 부분적으로 그러한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급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는 내용은 전통이 기대는 토대의 허약함이다.
음양, 노장사상, 유교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개신교 신자 - 특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신자 - 는 현재 모습의 기독교의 역사를 2천 년으로 믿는다. 사실이 아니다. 우선, 공관복음이 형성된 시기가 기원후 100년 이후다. 이단과 승리를 통해 가톨릭이라는 실체가 수립된 건 더 이후고, 삼위일체와 같은 용어도 예수가 말한 게 아니라 이후 신학자가 발명한 학설이다. 개신교 성경이라 할 만한 루터 성경은 훨씬 이후인 16세기에나 등장한다.
음양, 노장, 유교도 마찬가지다. 음양오행은 시원을 매우 예전으로 잡고, 유교와 도교는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공자와 노자의 활동연대를 고려해, 기원전 500년 경에는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도덕경』이나 『논어』는 훨씬 후에 성립된 것이다. 이 정도는 알았는데, 책은 음양오행도 똑같다고 말하니 다소 충격이었다. 음양이나 오행 모두 한나라 때에나 전개되었다는 게 갑골문과 청동기 기록을 검토한 김경일 씨의 주장 - 저자에 따르면,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기정 사실이라고 한다 - 이다.
음양은 상나라에서는 과학도 마술도 아닌, 그저 흐린 날씨와 햇살 드는 언덕에 불과했다. (195쪽)
한나라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한 추연이 오행을 만들어냈다는 시중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전설 (221쪽) 는
4. 동양사상이라고 좋은 말만 있지는 않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사상이, 실제로 당시에 의미하는 바는 다소 달랐다는 저자의 지적도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점한다. 가령, 논어 첫 구절을 그 시대에 맞게 해석한 부분이다. 알다시피,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이다. 이 구절을 흔히 연령과 계급, 인종에 관계 없는 보편적 의미의 배움과 관련짓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계급적인 의미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상나라 시절의 고급 정보는 바로 글과 주술적 셈법이었다. 이 고급 정보가 귀족 아들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현장이 바로 '학'이었고, 그 궃체적 과정이 '교'였다. (45쪽)
붕(朋)도 마찬가지다. 당시, 붕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재화를 충분히 가진 신분을 일컬었다. 그러니까, 논어의 첫 구절은 배움과 우정을 찬미하는 구절이 아니라, 출세한 자들 그들만의 리그를 찬양하는 꽤나 세속적인 발언인 셈이다.
한자의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재미있는 여정은 특히 5장에서 두드러지는데, 정치, 법, 덕, 성인 등에서 상식과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궁금한 사람은 직접 사 보길.
5. 우상을 제거하는 게 인문학
요즘 LP 루틀리지 시리즈의 호미 바바 편을 읽는 중이다. 호미 바바가 내세운 개념 중 '혼종성(hybridity)'가 있다. 이 용어가 포스트콜로니얼과 관련하여 쓰이면 다소 복잡한데, 여기선 아주 단순화 시켜서 어떤 문화건 100% 순종은 없다는 뜻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전통도 마찬가지다.
흔히 종교에서 두드러진 편인데, 자신의 세계관을 절대화시키려 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탈역사화. 자신의 세계관은 시원을 찿을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하며, 다른 세계관에 영향을 줬으면 줬지 받지는 않았다고. 그런 세계관은 없다.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다른 세계관과 섞였다. 추적해 가면, 생각보다 전통이라 불리는 것의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전통에서 벗어나기 힘든가. 귀찮아서가 아닐까 싶다. 유대 일신교 전통의 신 관념, 유교적 가부장제 그리고 그를 지탱하기 위한 장자 상속의 원칙과 제사, 주역, 음양오행, 사주명리학, 작명, 사적유물론 등 인간이 절대화 해서 믿는 신념체계는 뜯어 보면 의외로 뭥미,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로 이게 인문학일 텐데. 하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가 얼마나 귀찮은 짓인가.
귀찮다, 정말 귀찮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