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고아?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나 자신에게 내가 가끔 붙이는 이름이 바로 고아이다.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어버린 부모님과의 이별의 순간, 가장 먼저 입에서 뛰쳐나온 말이 바로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라는 말이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낼때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시점이었고, 어머니와의 이별의 순간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적응하던 시기였다. 부모님께 받기만 하고 무엇하나 해드리지 못했던, 마음을 있으나 무엇하나 쉽지 않았던 그 시간들은 붙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라는 탄식만을 남긴채 그렇게 난 고아가 되었다.
'좋은 이별!'이 있을까? 나의 기억속에서는 이런 아름답기까지도 한 '좋은 이별'이란 말은 그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부모님과의 이별도 그렇고, 삶을 살아오면서 수차례 있었던 연인과의 이별도 그랬다. 집에서 키우던 쬐그맣고 귀여웠던 강아지들과의 헤어짐도 그랬었다. 부모님과의 상처에서 헤어나는데는 2년에서 3년 정도가 걸린듯하고 연인과의 이별에서는 약간의 폭력성과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보신탕을 못먹었던 이유는 말안해도 모두 알것이고... 이렇듯 나에게 이별이란 '좋은'이란 단어를 붙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별할 때면,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모든 감정이 일시에 솟구쳐 오른다. 평소와는 다른, 어둡고 혼돈스러운 내면으로 들어가 저 위에 열거된 것과 같은 부정적인 자기 모습과 만나게 된다.바로 그것을 마주 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이별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 P. 33 -
외로움! 요즘 느닺없이 외로운 기분에 휩싸일때가 종종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회라는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하지만 문득 문득 찾아드는 외로움이란 감정에 한없이 추락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경험상 이럴때 가장 좋은 약은.... 바로 좋은 책 한 권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번에 손에 들게된 작품이 김형경의 심리 에세이 <좋은 이별>이었다. 몇년전 가볍게 만나기도 했던 이 작품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다시금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외로움이란 감정에 휩쓸린 나의 손에 놓여있다.
이별, 상실 그리고 애도! 김형경 작가의 심리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의 책장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책 한 권 정도는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그리고 이 책 '좋은 이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심리' 상태를 편안하고 공감가도록 이끌어내고 느끼고 깨닫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이별을 통해 자신을 변화 시키고 성장케 하는 작지만 소중한 방법들을 배우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별이 서투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작가는 다양한 국내외 작품들의 사례를 들어 알기 쉽게 이야기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속 미스 아밀리아를 통해, 김소월의 진달래 꽃속에서, 서정주 시인의 '신부'를 통해서 이별이 어떤 형태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이야기한다. 흑백사진처럼 기억되는 어린시절 겪었던 첫번째 이별! 선생님과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의, 혹은 애완동물과의 이별로 각인되는 유년기의 충격적 사건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그 구체적인 개념과 이론들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 멜라니 클라인의 애착 개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애도 5단계 이론 등 애도의 개념에 대해, 이별에 대해 심리적, 정신분석학적인 접근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투자로, 이별을 리비도의 회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리비도는 본능의 덩어리로 사랑하는 마음, 성에너지, 심리적 집중을 통트는 개념이다. <좋은 이별>은 총 4장으로 구성되는데 첫장에서는 바로 이별, 애도의 개념에 대해서, 두번째장에서는 리비도가 이별 후에도 여전히 상대방을 향하는 심리적 단계를, 세번째는 리비도를 거두어온 상태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비도를 변화와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와 문학 작품속 사례들을 인용해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재미와 느낌을 전한다.
충격과 부정,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하고, 공포와 불안, 그리움으로 이별의 상대를 그리워하던 단계들을 지나, 리비도를 거두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별의 대상을 벗어나 다른 대상에 대해 그 사랑을 쏟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조증으로 아픔을 거부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세번째 단계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리비도를 변화와 회복, 발전의 기회로 삼는 단계에서는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방법, 솔직한 자기표현, 용서와 참회, 떠난 사람과 분리하고 통합하는 마지막 과정들을 공감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우리에게도 애도 문화가 있었다.3일 동안 죽은 사람 곁에 머물기, 억지로라도 소리 내어 아이고 아이고 곡하기, 장례 후 일주일간 상석 올리기, 49일 동안 일곱 번 떠난 사람의 평온 빌어 주기. 예전에는 그런 의례들을 형식적인 겉치레 의식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 의례는 떠난 사람을 자 보내기 위해서뿐 아니라 남은 이들의 상실감을 쓰다듬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절차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 P. 226 -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위에서 작가가 말한 우리의 '애도문화'에 대해서 가졌던 선입견이 이 글로 인해 모두 풀리는듯하다. 죽은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경험적 가치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진다. 단조로운 일상, 외로움에 휩싸여 비쩍 말라만 가던 나의 감성들이 <좋은 이별>을 통해 풍성해짐을 느낀다. '좋은 이별'이 정말 있을까?란 의문으로 시작했던 우려는 어느새 밀린 숙제를 풀어버리듯 마음속 응어리마저 내려놓게 만든다.
고아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닫으려 했고, 떠나간 부모님을 아직까지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3년이란 기나긴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 마음의 안정을, 살아갈 희망을 찾았지만 아직까지도 후련치 못했던 안타까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된 뜻깊은 시간이었다. 물론 이별이란 녀석이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을때가 조금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김형경, 그녀가 말한 좋은 이별 레시피에 따른다면 예전의 그 힘겨웠던 아픔의 시간들보다는 손쉽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단 한번으로 완성될 수 없는 <좋은 이별>은 한동안 내 손이 닿는 곳에 자리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늘도 건강한 좋은 이별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