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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공부하세요.

글쓴이: Rhizomatous Reading | 201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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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습자지처럼 얇다. 읽는 내내 절망했다. 이 작가가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인 <마이 짝퉁 라이프>(* 리뷰 보기: Every life is "Real")을 읽으면서도 그랬는데, 이 작품은 그것보다 훨씬 퀄리티가 떨어진다.


출판사가 자선사업을 하는 곳도 아니고 팔릴 만하고, 독자들에게 읽힐 만하다고 판단했으니 작가랑 계약도 하고 책도 출판했을텐데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납득이. 좋게 생각하자면, 그만큼 한국의 독자층이 생각보다 두텁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소비하는 층의 스펙트럼이 넓으니깐 다양한 소설이 출간되는 거라고 해석한다면 고무적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암튼, (안타까운 마음에) 전전긍긍하며 읽던 중 화요일마다 문학동네 까페에 연재하는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읽다가, '이 글은 고예나 작가가 읽어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일부를 인용한다. 작가도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오래오래 사랑받으려면.


욕망의 말들은 뜨거운 불길과 같단다. 캐릭터들을 벌거벗기는 것도 작가의 수치다. 그럴 듯한 옷 좀 입히자. 소설 속 인물들은 종이 인형 같아서 뜨거운 욕망의 말들은 그 인물을 태워버린단다. 그것도 좀 유념해주면 좋겠다.


글쎄이 작가와 비슷한 군에 누가 있을까? 백영옥이나 정이현 작가? 이 양반들이 쓰는 게 거의 칙릿에 가깝다고 해도 적어도 이렇게 습자지처럼 얇지는 않다. 소설가면 그냥 소설가지 칙릿소설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다닌다는 것도 어찌 보면 작가로서는 탐탁치 않이겠지만, 칙릿을 쓰더라도 제대로 쓰면 좋겠다. 20(넓게 잡아 30대까지) 여성들의 성과 사랑에 포커스를 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세태소설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설사 아무리 칙릿을 표방하더라도 소설로서의, 문학으로서의 최소한의 품격은 존재해야 한다. 품격은 신사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니깐.


소설의 문장 역시 옷과 같은 일을 한다. 처음에는 날것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쓰여진다. 욕망의 문장을 써보자. "그놈을 정말 미워 죽이겠어!"라고도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그건 완전히 날것의 욕망이니까. 배운 인간이라면 "그놈이 미워 죽겠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나뭇잎으로 주요 부위만 가린 꼴이다. 그걸 옷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밉다고 그놈이 미워 죽겠다고 쓰는 문장을 소설의 문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적어도 "어쩜 얼굴이 저렇게 못생겼을까?" 정도는 써야 소설의 문장이다. 물론 이것도 그저 바지저고리나 걸친 꼴이지 어디 내세울 만한 옷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아래의 문장 정도로는 써주셔야 어디 남들 앞에 입고 나갈 곳 정도는 되겠다.


라고 하면서 인용한 것이 <안나 카레니나>의 한 구절이다. 인용 부분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찾아 읽어보시길.


욕망의 말들은 뜨거운 불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대통령이 되고야 말겠어. 그 녀석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거야. 현실의 우리는 너무나 입체적이고 복잡해서 이런 말을 할 때도 그게 과연 진심인지 아닌지 본인부터가 헷갈리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종이로 오려낸 사람들과 같아서 이런 뜨거운 욕망의 말들을 날것으로 입에 담다가는 그 자리에서 타버릴 것이다. 캐릭터가 자기 속마음만 말하지 않아도 그는 어느 정도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 된다. 대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아울러 소설 속에 인물은 왜 등장하는 건지 사건은 왜 일어나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인물들 간의 관계도 유기적이지 못할 뿐더러 사건의 개연성이나 사건 간의 최소한의 인과관계나 유기성도 없다. 이게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그냥 단순한 에피소드들의 모음일까? 언제부터 에피소드들의 모음이 장편 소설이라 불렸을까? 사실 나는 그 자체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결정적 취약점 중 하나는 소설 속에 장소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히 20대 혹은 ‘88만원 세대방이 없는 세대라고 한다. 집은커녕 방도 없어서 고시원으로 밀려나고 그곳에서조차도 점점 싼 고시원을 찾아 쫓겨나야 하는. 극중 화자인 정연희는 키스방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 뜬금없이 강원도에서 택시 교통사고를 당해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병원 생활을 한다. 그럼 그 긴 시간 동안 서울의 은 어떻게 됐을까? 그 부분이 큰 구멍처럼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작가가 얼마나 치밀하지 못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연희는 학자금 대출 갚으며 월세 내느라 원치도 않는 키스방 아르바이트까지 투잡으로 뛰는 인물인데 월세가 아깝지도 않았던 걸까? 인물 설정에도 치밀하지 못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능력자처럼 자유자재로 공간 이동을 할 뿐, 그 공간과 인물이 밀접히 연결되지 못한다. 친구들 역시 그렇다. 필요하면 부산으로 불러내렸다 다시 서울로 보냈다가 한다. 왜 그 장소가 소설 속에서 등장해야 하는지, 그 장소가 소설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등등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 킬링 타임용으로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작가님, 공부하세요. (오랜만에 노현정 버전으로. 진지하게. 하지만 깔대기로 머리를 때리는 따위의 야만적 행동은 삼가며.) 작가님이 노홍철 씨가 배철수 씨처럼 롱런하는 DJ가 되길 바라는 것(p. 281. 작가 후기 참조)과 비슷한 마음으로 하는 부탁입니다.


* 인용문 출처는 http://cafe.naver.com/mhdn/41628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_욕망의 말들은 뜨거운 불길과 같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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