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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그러면 이루어지리.

글쓴이: 놀라움, 그것이 삶이다. The Wonder That is Life. | 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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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욕망을 하라는 책을 만나다. 보통욕망은 억눌러라.’ 가 이 사회의 모토(?)가 아닌가? 이런 사회에 욕망을 하라니.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소위 성공한 축에 드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약간의 의아했고, 도대체어떤 사람일까하는 궁금함과 이런 글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얼까 무엇을 말하기에 사람들이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떤 존재이고, 사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나들이 모여 만든 곳이 사회인데, 많은 일들 속에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선뜻 내 의견을 말하기 힘든 곳이며 나는 많은 욕망을 갖는데 다들 그런 욕망이 없다고 말하고, 그런 욕망은 잘못됐고 옳지 못하다고 말하기에 나의 욕망을 감추어야 하는 곳이 사회 아닌가? 내가 이상하고, 솔직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어서인가? 점점 말을 입에서 삼켜야 했다.


 


사회적 현상일까?


무엇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해 주어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편안한 위로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사회를 꽉 쥐고 있는 법과 질서, 규범과 도덕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 아닌가? 앞에서 외치는 것과 보이는 것이 자신의 내면과 얼마나 일치할까? 보통 사람은 말할 나위 없겠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어떨까? 일단 성공한 사람은 소수이기에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질투를 한다. 그들은 진정 달라서 성공한 것일까? 그 외 나머지 다수인 대부분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 왜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나, 그들을 본 받아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부러움과 자식들이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희망을 포장한 우리의 욕망이 아닐까? 또 그들을 그 자리에서 추락시킬 꼬투리나 흠집을 내서 비난하고 깎아 내림으로서 별 것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 또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사람들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음에 위안을 얻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도 말하기가 부끄럽고 어렵고 특히 자신의 잘못에 대한 고백은 뒤따를 위험을 더 두려워하기에 우리는 침묵한다. 현실적으로 어떤 조직의 내부고발이나, 양심선언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그 단체에서 쫓겨 나가거나 소외 당하게 되기에 상당한 용기와 자신을 희생할 결심을 가지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너만 그렇게 양심적이고 잘났냐는 사람들의 질시가 더 두렵다.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없고, 고백할 수 없는 사회는 분명 억압된 사회이다.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통제와 패거리 문화로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적인 욕망까지 통제하는 우리나라는 억압된 문화와 사회이다. 또 이런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전통 안에 살고 있나?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다. 왜 이런 문제까지 전통을 강조하는 것일까? 스스로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을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하고, 굴절된 자신의 욕망을 자신으로 착각하고 떠벌리는 것은 자신이 아닌 허세의 모습이다. 이게 우리 사회(문화)의 문제점이 아닐까? 자신을 솔직히 말할 용기는 없으니 다양한 포장을 입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과장하기 위한 온갖 허세와 위세들을 더해 새로운 자신을 만든다.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닌가?


 


저자가 계의 인간이었다면 나는 색과 계의 중간에 서서 이 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는 회색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편한 대로가 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 우리 집의 상황과 나의 천성, 약간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지 두루 친해서인지 모두와 함께 경험하면서 자라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우리들 세계도 비슷한 모습(나이나 생각 그리고 외모)이었지만, 부모들을 따라 정말 구분이 가는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뒷받침이 되는 집에서 공부가 최고라고 그래야 성공한다고 교육을 받아 온 아이들,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 겨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공부를 죽어라 하고 싶지만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기에 힘겨운 걸음을 한 걸음씩 디뎌 나가는 아이들, 나머지 대부분은 평범한 아이들. 처음에는 이런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이 보였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고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는 수재형 공부벌레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미래에 있을 성공을 위해 지금은 참을 수 있다는 극기의 인간으로 변해갔고, 또 한편은 삶을 걱정해야 하기에 수업보다는 밥걱정, 가족걱정으로 그렇게 청소년기를 마감해갔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고 싶은 우리의 소망이었으나, 철저히 공부와 관련된 것 이외는 금지되고 무시당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한쪽의 인간밖에 될 수는 없었는지도.


 


이런 우리들이 지금은, 부모다. 기성세대들의 문제를 조금 극복한 중년 세대들은 목표의 과잉, 의욕의 과잉으로 무언가 하면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교육 받았기에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목표 없는 사회가 되었기에, 우리들의 외침은 공허한가? 아니 목표를 세우기가 힘들어진 현실이기에 우리들의 충고는 잔소리로 변했고,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5% 멘토와 95% 꼰대로 여기게 되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멘토가 되고, 누구는 꼰대가 되는가? 나는 어디에 속할까 점점 굳어가는 머리와 사고방식을 보면 꼰대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원하는 말만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크면 다 알게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기도 싫다. 공자왈이 어쩌구 저쩌구하는 노인들과 어른들은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하면서도 내 뱉어내는 말들 과연 믿고 따라야 할까! 우리들 스스로 지켜나가지 않기에 점점 사회는 한쪽으로 치닫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상은 변한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해서는 안 될 것도 많지만.


 


선배이다. 나는 ..했는데, 너는 ..하면 안 된다라는 말, 분명한 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점이다.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앞장서지 않는 한 자식들이나 젊은이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정말 하늘이 주신 기회와 자신의 노력이 맞아 떨어져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이루었지만, 자신이 걸어보지 못한 길과 후회가 남는 삶 그러기에 우리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그러기에 변화하여 그들과 함께 합심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 누구에게나 있는 유명해지고 싶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 우리는 어떤 욕망을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존재.”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자랑을 하고 싶다. 우리의 삶과 성공을. 나는 행복한 가족을 가진 중산층이다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회분위기와 가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의 해체라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가족이라는 관념도 이전의 개념과는 상당히 변화되었지만, 아직도 과거의 가족의 관념을 따지는 것은 이런 무너짐 속에서 남는 것은 오직 자존심이기에 자랑을 만들어 내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불과 일주일 전의 사실관계도 머리에서 마구 뒤섞이는 일이 많다. 게다가 끊임없이 자랑하고 합리화하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상당 부분은 늘 진실과 거짓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헤매기 마련이다.


 


대부분 사람은 특히 모범생은 항상 자기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애썼다. 가족들의 모든 희망을 거는 똑똑한 아들, 성공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에서 살아간다. 규칙과 이성을 끊임없이 지켜야 하는데 대한 강한 압박감과 내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이성을 뛰어 넘었다. 공부만 하는 인간들 공부 속에서 삐뚤어진 자신의 욕망을 키워나간다. 이런 삐뚤어진 욕망으로 커서 자신의 은근한 욕망은 몰라도 남의 은근한 욕망은 귀신처럼 잡아내는 것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간다. 왜 이렇게 자란 걸까? 철저히 좋은 점만을 부각시킨 책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본받아야 한다는 위인전 문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취가 자기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만들어진 결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위인전 속의 모습으로만 있는 그런 바른 존재가 아닌 온갖 번뇌와 회의의 산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는 내가 아닙니다. 단지 나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는 가짜입니다.


 


탐욕스러운 행동의 이유, 인정받으려는 끝없는 욕구, 비현실적인 사고, 이득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집착,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 질투심, 연애와 섹스, 접근


                                                        – ‘내가 왜 그랬을까중에서


 


이래서 우리 사회가 더 탐욕으로 가득 차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을 잘 보여주는 성문화.


인간은 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은 그렇게 감추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생물학적 성숙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점점 빨라지는 사춘기와 신체적 성숙, 계속적으로 사회적 압력을 통해서 억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몸에서 분출되는 육체적인 욕구와 생각들을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건강한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로 묶어둘 수 있을까?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유대인 랍비들은 “20세가 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남자는 매일매일 죄를 짓는다고 보았다. 결혼은 남자 18세 적당, 여자는 12세 이후면 가능하고, 인간은 외설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은 없다고 단언한다.”고 말한다.


 


술의 제국과 모텔의 천국인 대한민국, 이런 상황에서 애들에게는 절대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과연 말이 먹히겠는가? 너희들은 절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어디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모텔, 모델은 잠자는 곳이다. 하지만, 누가 부정한 곳으로 만들었는가? 기성세대들, 우리들이 아닌가?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이란 무얼까? 다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과 불륜은 한 장 차이도 아닌 반장 차이인가? 우리는 항상 색을 억제하고 표현하면 안 되는 것으로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살았다. 그러기에 “겉으로 보면 계()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색()의 노예인 사람입니다. 색과 과도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그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색은 내부로 점점 숨어들어가서 차곡차곡 쌓여간다. 언제 이 쌓인 더미가 폭발할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하고 나면 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한결 따뜻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나 나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 저나 나나 다 욕망의 인간이기에 더 관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욕망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왜 자신보다는 타인의 모습을 보려 하는가?


스타들의 스캔들과 세간에 화재가 된 “변양균과 신정아사건”, 어떻게 보면 중년의 남자와 처녀의 불륜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의 지위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렸다. 우리는 하지만, 저들은 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 왜? 그들은 배웠고, 지위를 가졌기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왜 사랑하면 안되나요? 희생양이 되어버린 처녀의 말. 하지만, 사회는 이들에게 삿대질을 해댄다.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그녀는 사랑을 했을 뿐이다. 물론 학벌은 만들었지만.


 


어떤 사람은 청춘의 기억을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기에 더 나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성욕은 청춘에게 있어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지 단죄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수준과 정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성과 사랑도 역시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청춘기에 이성친구,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학교와 공부라는 틀 속에 묶어 버리기에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혼자 설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사람 속에서 시선을 자신보다 타인에게 맞춘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현실이 불일치하기에 경쟁과 폭력을 낳는다. “모방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모방을 강화합니다. 무제한의 야망과 과도한 경쟁은 사회를 파괴합니다., 학벌은 욕망의 중심이고, 성공으로 가는 지름 길이었다. 그러기에 공부만이 중요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공부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살았기에 부가 성공이기에 부의 세습을 위해 더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제는 성장했지만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고 항상 이루지 못함에 사랑을 갈구한다. 흔히 하는 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내가 하면부탁이고 남이 하면청탁이 된다. 이제는 혼외정사니 불륜은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도 못한다. 어디에 가든 있는 모델과 술집 그리고 매춘, 혼인 외 사랑이 흔한 이 시대 무언가 잘못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 이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욕망들을 해소하지 못해서? 규범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제때 불태우지 못한소년’, 소년의 시간은 공부라는 출세의 사다리 밑에서 사라져 버렸기에 소년으로써의 꿈을 꾸어 볼 시간도, 행동도 없었기에 중간이 붕 떤 성장에는 공허와 불균형이 생긴다.


 


사회와 나, 그 적절한 타협은? 우리는 어떻게 자라왔는가? 흔히 친구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낮은 사람들과는 어울리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커서도 타인과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정한다. 출세, 이득, 권력이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탐욕은 어떻게 자랐는가에 달려있다. 보통 부모의 용인되는 행동과 용인되지 않는 행동의 교육에서 배우게 된다. 그래서 부모의 영향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친구들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적이나 능력 등 비교 위에서 살아왔다. 타인과의 비교는 질투를 불러 일으키고, 질투는 잘못된 결정을 유발하게 된다. 명성이라는 독약은 사람들을 스스로 자기 파멸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사회적 지위나 평판은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제발 자신에게 만족하기를.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서툴다. 사랑하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


우리의 시간은 짧다. 특히 젊음의 시간은 더 짧다. 사랑과 만남에서 “자신과 안 맞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사귀어보고 아니면 돌아설 수 있는 태도와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헤어질 수 있는 용기와 혼자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혼자보다는 둘이 되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질 않는가.


 


점점 무너지는 남성우월주의와 점점 똑똑하고 씩씩해져 가는 여성들 속에서 점점 고립되는 남성들, 대부분의 종교와 가정과 사회에서는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누가 높고 누가 낮으면 사랑이 될까? 평등한 사랑 그것이 사랑이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혼외의 사랑이 넘쳐나는지, 결혼생활은 왜들 그렇게 불행한지, 제도로서의 결혼이 과연 법률이나 의무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간통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엄격히 이런 일을 다스리지 않으면 사회와 도덕이 무너진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도 죄입니까?를 외치는 사람들 과연 누가 맞을까? 이런 일로 사회는 법과 도덕으로 처벌을 가해야 할까.


 


법이란 무엇인가? 최소한 법적으로는 인간에게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으나, 인간관계의 배신을 형벌로 처벌할 수 없다. 단지 사회유해성을 따지기에, 법의 가면을 쓰고 윤리나 도덕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얼마나 유해한지 구체적인 기준은 만들기도 쉽지 않다. 법을 만드는 국회는 다수결로 그 사회 주류의 가치관과 믿음을 법률에 반영할 뿐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불편함이 먼저고, 그 불편함을 합리화하는 이유는 나중에 만들어집니다.” 무엇보다 법을 만드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도 모두 배운 사람들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 대부분 판,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언론인과 방송인 출신들이 차지한다. 또한 정부관료들도 대부분 고시출신자들이다. 암기의 수재들이 지도층을 이룬 우리 사회, 분명 발전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다. 이들은 계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한쪽만을 대변하는 법과 현실에서 현행 법체계 하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억울함과 부담함을 만드는 법체계라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


 


변해야 할 때다.


이제는 우리만의 기준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다. 전 세계적으로 강조하는 창의성, 하지만, 주입식 암기교육으로 이루어진 교육으로는 창의성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창의성이 모자란 사회에서 어떻게 한 순간에 창의성이 넘치는 사회로 변모할 수 있을까? “창의성은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 주위를 둘러보라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살았기에 이런 사람들은 별종이라고 불리는 일부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정해진 경계의 선을 넘는 용기와 우리 사회의 한계를 인식하고 뛰어넘는 것이 중요하다.


 


암기의 수재들이 이끌어 온 법관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법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보통사람들을 위한 법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날 필요도 있다. 법과 질서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 아닐까? “인생이란 규범으로 촘촘히 짜인 바둑판 위를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내딛는 것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그러나 이 범주를 벋어나서 바라보면 인생이란 정말 아름답고 살만한 것 아닐까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한 시집의 제목처럼, 정말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더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 아니면 또 그런 삶이 반복될까?


 


더 많이 놀고, 덜 초초해 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발췌.


 


왜 이 책이 인기가 있을까?


대부분 하지 말라가 많은 우리 사회,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하라고 한다 그것도 욕망을, 욕망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대부분 안 좋은 반응,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 그렇게 배웠고, 그런 사회이니까. 우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적욕망, 욕구, 규범에 반하는 행동 등을 철저히 억제하는 법을 교육받아왔고, 공부와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 등은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을 교육받아왔다.  보통 법조인 출신 대학교수라면 폼을 잡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자랑하고, 사회는 이러니 저러니 이러해야 한다고 가르치려 든다. 한마디로 자신의 출중함을 자랑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자랑을 많이 하지만, 사실적으로 자랑한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인간이기에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양심고백에 가깝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건드리기 싫어하는 우리 사회, 문화의 문제점을 잘 지적한 책이다. 저자는 누구보다 착실한 기독교인이고, “그 법과 규범에 역사적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정신으로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공한 지식인이기에 이런 책이 또 다른 형태의 위인전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다들 자기 자랑 늘어 놓는 그런 책이 아니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책이라 새로운 모범이 될지도 모르겠다.


 


학력을 속이고, 논문을 표절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범죄를 일으키면서도 왜 반성하지 못하고 계속 잘못을 반복하는 걸까?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화, 역사, 사회, 가치관 등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 왜 우리는 스스로 길을 잘 만들지 못한다. 대부분 제시된 대로 따르면서 살아왔다. 왜 그들(기업이나 정부)이 제시하는 것들만을 따르고, 사용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달라고, 이렇게 해달라고 요구해서 그렇게 만들지도 못하는가? 그래서 사랑도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고, 지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라고 하고 싶다. 사랑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이 아닐까? 서로를 사랑하면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러면 더 솔직한 곳이 되지 않을까? 불교의 가르침처럼 “욕망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색계에 이르게 된다.” 색이 우리의 마음속의 어두움과 죄가 아니라 밝음과 희망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고, 모두 함께 하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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