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따뜻한 바람으로 서서히 바뀌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나는 오고가는 출·퇴근 길에 이 책을 읽었다. 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쓴 24개의 질문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살면서 고민하거나 생각했을 법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들은 아니다. 그 질문들은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고 있거나, 인간이 닿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에 놓여 있는 질문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차동엽 신부는 오래 전에 부탁받았던 이 24개의 질문들을,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놓은 고뇌의 대답들을 내가 내놓은 대답들과 비교해 가며 읽었다. 나 역시 7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기에, 그의 대답들은 무척 익숙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은 그의 말처럼, "정신없는 추격전을 벌였지만 상대를 놓쳐버린 형사꼴"이 된 것 같다.
외로움은 '홀로 혼자'이기에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고독은 '더불어 혼자'이기에 더 이상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외로움은 타인의 고통을 품지 못하지만, 고독은 타인의 고통을 품습니다. <134p>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외로움은 '홀로 혼자'이고, 고독은 '더불어 혼자'이다. 차동엽 신부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살면서 외로움과 고독을 자주 느낀다. 내 곁에 부모님, 친구, 애인이 있더라도 '홀로 혼자'라고 느꼈던 적도 있었고, 그들 중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났을 때는, 이 세상의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혼자'라고 느꼈었다. 지금도 나는 외로움과 고독을 오락가락 하며 삶의 일정 부분을 할당하고 있다.
나의 외로움은 공허함과 지나간 추억들 속에 숨쉬고 있으며, 불현듯 찾아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때마다 나는 무척이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짐승이 되어,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나를 한없이 침몰시킨다. 그리고 지금 '홀로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 차동엽 신부의 말처럼 내게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홀로 혼자'인 상태로 머물 수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고독을 나누어야 하고 '홀로 혼자'로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나의 외로움은 나의 고독을 더욱 빛나게 한다. 내가 지금 외로움에 처해 있고 처할 줄 알기에, 다른 누군가의 외로움 앞에 고독으로 대면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나는 혼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고독을 공유한다. 그리고 내 안에 사랑의 샘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 시간은 앞으로 있을 운명적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고, 삶의 성찰을 통한 성숙의 시간이다. 나는 외로움으로 죄인이 되었다가 고독으로 구원함을 받는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평소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오직 믿음'도 '오직 실천'도, '오직 성장'도 '오직 복지'도, '오직 우'도 '오직 좌'도, '오직 사랑'도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합니다. <187-188p>
유독 24개의 질문들 중에는 종교와 관련된 질문들이 많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던 故 이병철 회장의 심정이 느껴지는 듯 하다. 종교적으로 광신도들은 자신들이 만든 관념 내지 현실의 우상들에 매료되어 정상적인 사유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을 맏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 낸 우상들을 믿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오직"을 외치는 분위기가 우려되었다. 정부와 국민들이 "오직 경제 성장"을 외치며 달려온 지난 4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특정 계층만의 이익을 증진시켰을 뿐, 대다수의 국민들은 IMF 때보다 더 힘든 생활을 겪게 되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는 "오직"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무시한 채, 더불어 사는 사회를 철처히 외면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직 복지"로 기수를 틀어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앞만 보고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개인을 둘러 싼 상황들과 사람들 간에 진실한 소통이 없다면, 최선을 다한 개개인의 노력들은 결국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결과들을 낳을 뿐이다. 우려되는 것은 그 결과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계층 간의 갈등, 정의로움의 상실, 비리와 부패 등으로 혼란스러운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좀 더 신랄하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보면 신의 존재는 이제 '신이 과연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는 측면이 다분합니다. 애당초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바람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신의 존재를 강변하려 하는 것입니다. <212p>
신에 대한 인간의 고민은 인류의 시작 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도 신에 대한 궁금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고, 청년이 되어서는 7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의 흔적과 정체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신은 분명히 있다. 차동엽 신부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정확한 질서 속에서 규칙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지금 이 세상을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우연적 결과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다. 그리고 하늘 너머 저 우주는 너무나 광활하고 그 광활함을 비교하여 볼 때, 인간은 작은 먼지와 같다. 아직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저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을까? 신의 정체는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신의 흔적은 이 세상에 만연하다.
나는 유신론자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유신론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 차동엽 신부는 자신이 믿는 가톨릭의 교리를 예로 들면서 다소 기독교 세계관으로 신을 해석하지만, 그건 가톨릭의 교리가 말하는 신일 뿐이다. 신은 유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유일한 신이 "하나님", "하느님", "한울", "알라" 등등.. 특정 종교들에서 부르는 하나의 명칭만으로 존재하여, 그것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인간에게 제압당한 신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종교적인 교리 차이로 신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명명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자신을 믿는 증거로써 어떤 교리에 따른 신앙 생활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앙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그저 이기적인 교리일 뿐이다.
나는 누구든지 신을 교리로 믿기 이전에,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경험하고 그 흔적을 찾는 일을 먼저하라고 말하고 싶다. 책으로 신을 알 수 없고, 경전으로 신을 알 수 없다. 종교는 체험에 따른 깨달음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 논쟁을 하기 보다, 아침이 되어 해가 뜨고 밤이 되어 달이 뜨는 광경과 사계절이 때를 맞추어 변화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며 그 경이로움에 의문을 갖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신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강제적인 요구나 교리에 따른 신앙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은 단지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이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좋기를 원한다. 인간들이 이러한 신의 마음을 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악인도 선인도 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결단이 만드는 것입니다. <274p>
흔히 선인과 악인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오래된 고민일 것이다. 특히 악인이 득세하고 형통하면, 자연스럽게 선인들은 핍박과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가? 선한 행동은 무엇이고 악한 행동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기준은 시대가 지난 후에야 평가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민의 대부분은 히틀러가 독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지만, 영국이나 폴란드,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악인이라 칭하였다. 결국 인간은 상대적인 기준들 속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을 판단할 때 선인과 악인을 혼동하여 명명한다. 마치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의사지만, 일본인들에게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처럼.
다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믿는 말과 행동들을 실천할 뿐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그러한 선택권이 있다. 하지만 그 자유의지의 남용을 막기 위해 법과 윤리는 마지노선처럼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선택에 따른 처벌과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법과 윤리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선악의 판단 기준이자,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안전 장치이다. 문제는 법과 윤리 역시 상대적이기에, 인간은 매일 발생하는 상황과 가치 판단 속에서 자유의지를 도구삼아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할 것을 요구 당한다. 신은 인간에게 그러한 고통과 기쁨을 선물했다.
"얼마나들 힘들지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인류 고난의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도 꼼꼼히 추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꿈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진다!' 다만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변수 안에서!'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버티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답은 '버티기'입니다." <351p>
아마 지금 시대를 사는 꿈 잃은 자들에게 차동엽 신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으로 청춘을 다 보냈던 암울한 70-80년대의 청년들도, 그 시절을 버텼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IMF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했던 90년대 말에도, 수많은 국민들이 금을 모으고, 기업들은 알뜰한 경영을 하였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져 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허덕이고 있고, 실업률과 물가, 가계 부채는 증가했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기 때문에 회복과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즉 아직 살아있기에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고, 완전히 망하지 않았기에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올해 나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마땅히 정규직으로 취업할 곳은 없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에 나는 선택해야 했다. 불편하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가? 불안정하더라도 꿈 꾸었던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정도에 해외 유학을 결심했다. 충분한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로 나가 본 적도 없다. 오로지 나 스스로가 다가오는 상황들과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고 번거로우며 불안하다. 하지만 가야 한다. 그게 내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버티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을 견딜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꿈이 있다면, 스스로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지금 버틸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정말 작은 움직임이지만 가지고 있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더불어 혼자' 즉 '고독'하기 때문이다.
밤 11시.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책을 다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 힘든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인들 안 힘들었겠는가? 그럼에도 시대가 시대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꿈과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 자체가 시대의 꿈이자 희망이다.
책과 영화, 연극, 음악을 통해 고통 당하고 힘겨운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책에 수록된 24개의 질문들과 그 대답들이 누군가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이 책은 엄청난 위로가 될 것이다. 아마 저자인 차동엽 신부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핵심 단어가 '사랑'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자 단어인 '사랑'은 어느 시대에서나 필요하고 통할 수 있다. 특히 지금 시대에 '사랑'은, 시대의 암초에 상처 입고 고통 당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자칫 천주교의 교리 서적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만약 이성적으로 모든 상황들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신과 인간에 대한 질적인 질문들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인 차동엽 신부는 소신있는 말과 글로써 오늘날과 연결하여 24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을 뿐이다. 아마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등등.. 누구라도 24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사랑'과 관련된 단어들을 자신이 대답하는 내용들의 핵심 단어로 내세우지 않았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24개의 질문들의 공통적인 답으로 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