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어휘의 부족을 실감했다. 책읽기를 마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면서 마음속에 느낀 감정을 옮길만한 적당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억지로 생각을 쥐어짜 끌어올린 단어는 내 느낌과는 아주 동떨어진 이방의 존재였을 뿐이다. 고민을 거듭하다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보고 있는 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인은 내가 그동안 쓴 리뷰 3편을 읽어보고 나서 나의 글쓰기에 대한 처방을 내렸다. 작가 김훈과 박완서님의 소설, 그리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를 읽을 것을 추천했다. 그분들의 글이 나의 글체와 맞는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이 책과의 인연, 아니 박완서 작가님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저자 박완서 님은 한국 여류 문학계의 한 획을 그은 분으로 칭송받는다. 그분에 대한 문학계의 “그의 문체는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현실을 그려내며, 치밀한 심리묘사와 능청스러운 익살, 삶에 대한 애착, 핏줄에 대한 애정과 일상에 대한 안정된 감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성숙을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이다” 라는 평은 한국문학계에서 박완서님이 차지하는 무게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박완서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의 순전한 기억만을 의지하여 기록한 작품이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 유년의 기억’이라는 부제처럼, 묵은 기억의 더미를 파헤쳐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의 꿈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시작하여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를, 한 폭의 수채화와 한편의 활동사진이 교차되듯 맑고도 진실 되게 그려낸 소설이다. 어릴 적 박적골에서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대가족에서의 생활, 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로 인해 시작된 서울생활, 그리고 외톨이로 보낸 서울에서의 학교생활, 여리고 섬세한 기질의 오빠와 함께 어우러진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30년대 개풍지방의 풍속과 훼손되지 않은 산천의 모습, 순박한 생활상, 인심 등이 담담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작가 개인의 추억의 단편들인 문학소녀의 꿈을 갖게 한 학창시절 친구와의 애기이며, 방학마다 내려간 박적골에서의 추억, 오빠의 직장생활로 펴게 된 살림. 오빠의 결혼과 새언니의 죽음, 그로 인한 오빠의 방황,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한 8.15해방,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한 숙부의 죽음 등, 현대사를 살아간 우리네 부모들과 같은 시대를 산 작가의 체험담이 무척이나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자신의 기억에 의지해서 쓰는 자전적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 애기를 하 듯 담담함으로 무장한 치밀한 묘사로 추억들을 하나씩 그려내고 있다. 마치 오래전 인기리에 반영되었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
작가처럼 6.25 이전 세대를 아니지만, 이 책을 보는 동안 대뇌의 한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어릴 적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 옛 기억에 마음이 참으로 오롯했다. 방학 때면 내려가 방학을 줄 곳 보낸 박적골과 같은 큰집에서의 할머니와의 추억, 방죽이나 뚬벙에서 발가벗고 멱 감던 기억, 여름 밤 수박과 참외서리로 하다 혼줄 난 기억, 겨울밤에 처마 끝에 참새를 잡는다고 모닥불을 비추다 외양간 천장을 홀라당 태웠던 기억. 대보름날 모닥불 놀이. 군용트럭 뒷 칸에 타고 다니던 유치원의 기억. 해바라기 씨앗을 골고루 나누어주던 아주 예뻤던 유치원 선생님. 그리고 한반 70명이 넘었던 오전, 오후반의 빗물이 새던 초등학교 교실의 기억, 난로에 도시락 구워 먹던 기억, 선생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그리도 애썼던 그 시절의 추억과 어우러진 애기들이 하나둘 씩 들려왔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렵고 힘들던 애기는 차지하고라도, 국민투표에 부쳐진 유신헌법의 통과를 위해 그 추운 겨울날 팻말을 들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치고 다녔던 유신구호를 비롯한 각종 정치 행사에 불려 다니던 기억과 학교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유신헌법에 찬성하라고 부모님께 애기하다 야단들은 기억등도 있다.
저자인 박완서님은 이렇듯 기억에 의지한 이 소설을 과연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시했다. 서문에 “이 소설에서 그걸 특별히 강조한 건 아마 순전히 기억에 의지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환기시키기란 덮어 둔 상처를 이르집는 것 같아서 힘들고 자신이 역겹기 까지 하다.”고. 하지만 저자의 체험이 밑바탕에 깃들지 않은 소설을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체험하지 못한 가상의 애기에 휴머니즘적인 체험이 깃들지 않은 기록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 책의 말미에 평론가 이신 김윤식 교수님의 “기억과 묘사”라는 평론에 의하면 “기억의 도움을 받는 회상의 형식, 이것만이 소설의 순수 혈통이라는 것, 주관 ▪ 객관의 자기 속에서의 통일이 가능한 영역이야말로 소설이 서고 머물 수 있는 장소라는 것(중략) 소설과 기억,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기억에 의지한 이 소설을 소설의 순수 혈통이라고 말씀하신다.
기억에 의지한 박완서님의 1992년 작《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어릴 적 기억의 파편들을 기술함으로 인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한 매개체로서 이미 그 소설의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한국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여류작가로 평가되지만 이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박완서 님. 하지만 어떠한 게기가 되었던 지금에라도 그의 내밀한 필치와 상세한 기억에 힘입은 이 작품을 접하게 되었음이 나에겐 하나의 행운이다. 박완서 작가님의 기억에 의지하여 나 또한 추억이라는 귀한 보물을 아련한 기억의 더미속에서 발굴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행운을 더 이어가고자 난 아직 끝나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그 산이 정말 거기 있을까》를 구하러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늘 밤 꿈에는 아마도 어릴 적 뛰어놀던 그 시골큰집의 너른 앞마당과 그 동무들이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