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산다. 베란다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매일 아침마다 안개 자욱한 바다를 대면한다. 바다의 일렁임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바다에 놓인 내 인생은 항해 중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할지, 가야한다면 어디로 가면 되는 건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시작점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혼자 놓여 졌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언제까지 짊어지고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가고자 한 곳은 어디부터였는지 조차 가물거린다.
아마도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의 『노인과 바다』 집필 동기도 여기 어디쯤 있지 않았을지 감히 예측해본다. 만약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의 작품을 읽고 감상하고 느껴낼 일은 내 몫이기에 내가 그렇게 공감하고 해석했다면 그것이 헤밍웨이의 대답이 되리라고 건방지게 말하고 싶다.
일장춘몽 같던 항해였다. 조그만 낚시용 어선을 타고 나간 짙푸른 바다에, 외로운 낚시 줄 하나 드리우고 기다림만 배운 한 노인의 주름 속에서 바다의 짠내가 진동한다. 한 평생을 엄마처럼 보듬어준 바다의 자장가에 잠들기도 하고 때론 그녀의 분노에 그저 몸을 내맡겨두기도 했지만 결국 노인을 품어주고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바다였다. 바다에서 탄생한 그의 인생이 대양大洋의 먼지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대지大地에만 어미가 있는 것이 아니리라. 샛초록의 심해에서 뿜어나는 생명의 기운이 탄생의 출발선이다. 묶여진 의무처럼, 내 생애 업처럼, 그물을 짊어지고 바다로 향할 때가 가장 당연한 노인의 삶이다. 그에겐 바다가 일상이다. 그렇기에 말없는 바다에 나가는 일이 결코 외롭지 않다. 별빛이 가장 진해지는 새벽에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은 여느 어부나 가지는 운명이다. 산티아고 노인에게만 특별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끝에 가서야 평범한 삶이 가장 괜찮은 삶임을 알아채는 것처럼 만선滿船의 꿈이 꿈으로 남아 있을 때 더 기운을 내고 희망을 가지 듯 하다. 그러나 막상 꿈이 이루어지고 만선滿船이 현실이 되어버리면 내 몸은 그러한 감정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턱, 하고 스르륵 삶의 기운이 빠져나가버리고 경험해본 적 없는 텅 빈 허무감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건 일상이 아니기에 그렇게 고대하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오히려 꿈에서 깨어날까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리는 작금의 순간을 놓칠 수 없어 손을 휘휘 저어보지만 결국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라리 내게 그런 운이 닿지나 말 것을, 하는 마른 후회를 읊조린다. 삶에 대한 집착, 내일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 허무하고 지친 결말로만 끌려가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우리도 모른다. 다만 그렇지 않을까 하는 짐작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며 단순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인생의 항로란 여기서 저기로 가는 도중 만들어질 여러 이야기 꺼리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걸 확인한다. 이야기 선이 굵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얇은 책이니만큼 긴장된 서사는 없다. 신기한 건, 그래도 끝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고작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같은 어부의 길을 가는 노인과 소년이라는 단순한 설정이다. 그러나 단순함이 낳는 두 사람의 감정의 교차는 깊고 아득하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것이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 애가 있으면 좋을 텐데”1).
노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소년 마롤린이다. 이 말을 하면서 얻는 위안, 그 녀석만은 내 편이 되어줄 텐데 하는 기대감, 그 녀석의 운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약간의 후회, 그래도 돌아가면 소년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희망까지 뒤섞여 샛푸른 바다에서 출렁댄다.
어느 순간부터 노인은 물고기와 노인 자신을 동일시한다. 바다라는 같은 어미의 품에서 태어난 형제 같다. 그래서 상어에게 뜯기는 형제를 지키기 위해 노인은 상어의 숨구멍에 창끝을 겨눈다. “운수 좋은 날”2) 일 줄만 알았던 춘몽은 상어의 공격시점부터 이미 흩어져 버리고 없다. 그건 “오래 가기에는 너무나 좋은 일이었”(107p)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부에 대한 자부심이다. 야구 선수 다마지의 아버지가 어부였고 성 베드로도 어부였다는 사실을 자신의 낚시 줄에 엮어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빈곤한 어선이 부끄럽지 않았는지 모른다. 비록 그 사실이 이 순간의 치욕에 대한 삶의 동아줄이었고 결국은 그게 노욕老慾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노인의 쏟아지는 독백을 주워 담느라 가슴이 분주했다. 이성과 감성의 대화가 계속 되었고 머릿속에서 하는 말들을 가슴 속에서 제어할 수 없었다. 육성으로 뱉는 말들은 일종의 위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나 자신에게 쏟았던 삶의 물음표들이었기에 꼼짝달싹할 수없이 노인의 바다에 나 역시 내동댕이쳐졌다. 이정표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 동서남북이 똑같은 바다가 내놓은 무수한 선택의 보기들 중 내가 길어 올리는 커다란 물고기가 온전히 내 것으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기서 해답들을 낚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품은 채.
남아있지도 않은 행운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 겨우 육지로 돌아갔을 때, 비록 흉물로 남았을지언정 위대한 흔적을 사람들 앞에 내놓음으로써 소년의 운이 노인에게 조금이나마 흘러갔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탄생의 시작점에 서 있는 소년과 죽음의 끝에 서 있는 노인이 바다라는 공통 공간에서 만나 결국 하나의 운명공동체로써 교차점에 맞닿아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꿈의 바통이 노인에서 소년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미지의 여신, 바다로부터 밀려드는 두려움을 간직한 채 그들은 계속 바다로 노 저어 갈 것이다. 거기에 그들의 삶과 꿈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도 삶의 한 점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인생의 곳간은 채워질 수 있는 걸까. 채워도 부어도 허기지는 곳이 인생의 곳간이란 생각이 든다. 버릴 수 없는 욕심과 그 욕심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더해지는 무상함을 이미 알면서도 달려든다. 이것을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단순한 결론이지만 허무함 때문에 꿈조차 꾸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죄악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그렇기에 헤밍웨이 작품의 존재가치가 빛난다. 고된 삶일지라도 그 여정이 지나는 곳마다 뿌려놓은 삶의 악착같은 흔적은 노인의 존재를 더 나아가 내가 여기 있었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배가 나가기 좋은 바람이 분다. 얼른 나갈 채비를 한다.
“엄마 어디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눈을 비비며 묻는다. 나는 아이를 꼬옥 안아준다.
“엄마, 회사 다녀올게.”
오늘도 힘찬 하루가 될 듯 하다.
1)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제목 인용
2) 이 책의 46p, 49p, 52p, 53p, 59p, 64p, 86p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