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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연대

글쓴이: 독서와 사색의 즐거움 | 201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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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만 잘 한다고 해서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거나 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떤 실수나 그로 인한 비난과 질책이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하자면 상황을 수용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다듬는 것이 삶에 있어서는 더 유용하다 하겠다.  젊은 시절에 나는 그것이 꼭 패배주의인 양 생각했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내거나 어떤 상대와도 맞서 싸우리라 결심했었다.  그럴수록 상황은 점점 더 꼬이거나 악화되었다.  젊은 시절의 만용은 때가 되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이지만 이따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일도 많았다.   


 


소설가 은희경의 다섯 번째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읽었다. 표제작을 포함해 6편의 단편이 묶인 이 소설집은 은희경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로 '역시, 은희경이야!'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각각의 소설들은 내용을 달리하여 전개되지만, 제 살던 터전을 떠나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학업을 위해서, 독립을 갈망하여, 결혼과 함께, 또는 피치 못할 이유로 우리는 고향으로부터 멀어진다.


 


"내가 갇혀 있는 T아일랜드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  나는 거기 실려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더이상 깨어지지 않는 안전함이나 변하지 않는 소중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나는 믿었다.  가을에는 언제나 좋은 일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p.143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중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절망과 고독의 황무지에서 기적처럼 사랑이 움튼다는 것을.  작가는 끝내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약속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고독한 삶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냉정하리만치 등장인물의 삶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삶의 깊은 곳에는 언제나 욕심과 타락이 빚어낸 어설픔과 군색한 그 무엇이 있게 마련이지만 먼 훗날 그것은 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때 마리는 언니가 마리를 오해하듯 자신 역시 언니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뭔가를 잘 안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질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p.223~ p.224 '금성녀'중에서)


 


각자 저마다의 삶을 살고, 저마다의 개별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지만 사는 동안에 철석같이 믿었던 나만의 특별했던 삶은 하나의 각기 다른 눈송이가 땅에 닿아 스러지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 자신의 개별적인 특별함을 잃고 서로가 연대하는 보편성의 강물로 만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속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배운다.  특별했던 사랑도, 특별했던 추억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보통의 그 무엇이 된다는 것에서 자신만의 그 무엇을 꿈꾼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자 하룻강아지의 무모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p.116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철학은 결국 문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각자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며, 더할 수 없이 성스럽다.  어느 위대한 철학자인들 눈송이처럼 많은 저마다의 삶을 한마디의 말로 확정할 수 있으랴.  다만 사랑으로 이어진 개별적인 삶의 슬픈 연대만 계속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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