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종교적 인간이다. 신이나 절대를 섬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정 사상가를 신봉한다는 의미에서 종교적 인간이다. 그의 지적인 연대기를 돌이켜본다면, 바디우는 마르크스-레닌, 알튀세르, 사르트르, 마오쩌둥, 라캉의 신도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라캉과 헤겔의 충직한 사도이다. 바디우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선언의 철학적 몸짓은 한마디로 말해서 '플라톤적 몸짓'이다. 20세기를 반플라톤주의의 시대로 규정한 바디우는 다시금 플라톤의 화려한 귀환을 요구한다. 이른바 라캉 좌파의 시각으로 해석한 플라톤으로의 전환이다.
바디우의 1989년 저작인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은 존재, 진리, 주체에 대한 그의 옹골찬 옹호다. 90년대 탈근대주의자들이 선동했던 '철학의 종말' 론에 대항하여 내세운 철학자로서의 양심 선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내세운 철학의 종말은 사실상 좀더 풀어보자면 역사와 주체와 진리의 죽음을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바디우가 보기에 존재, 진리, 주체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고전적인 철학적 범주다.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 사랑, 과학, 예술이라는 네 가지 진리 생산 절차에서 생산된 진리를 수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디우는 철학의 임무가 철학의 종말, 형이상학의 종말, 이성의 위기, 주체의 해체라는 반복되는 공언과 단절하여 근대적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고 데카르트적 성찰의 혈통 속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디우의 '철학의 귀환' 작업의 시작은 존재의 다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존재는 일자가 아니라 다수인데, 존재가 일자로 환원되는 것은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적 작용 때문이라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바디우가 설정한 이런 수학적 존재론에 공감할 수 없다. 바디우에게 수학은 존재론과 동의어다. 19세기 이후 게오르크 칸토어의 집합론의 창안과 20세기 미국의 수학자 코헨의 작업에서 수학적 존재론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자/다수/무한이라는 기본적인 철학소를 언어학의 틀에 넣었을 때와 수학의 집합론에 넣었을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포모스트모더니즘에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된 타자와 관련해서도 집합론의 속함과 포함이라는 틀에 놓고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윤리적 요청에 이르게 된다.
진리가 여럿이라면 그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도 여럿일 수밖에 없다. 바디우는 그 영역을 '진리의 유적 절차'라고 부르고, 그것을 혁명적 정치, 사랑, 과학, 예술 네 가지로 분류한다. 바디우의 진리관은 협소하다. 단지 과학적 진리, 예술적 진리, 정치적 진리, 사랑의 진리만을 철학의 사유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윤리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처사가 무척 무책임하다. 바디우는 '윤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한참 유행하는 도덕철학이 정치철학의 회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인권과 타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칸트로의 회귀를 옹호하는 근래의 추세에 불신의 눈길을 보낸다. 그에게 도덕과 철학은 궁합이 맞지 않는 조합인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철학이란 시대의 진리들을 규정하는 사건적 형식 속에서 네 가지 유적 조건들(시, 수학, 정치, 사랑)이 공가능하다는 것을 사유 속에서 엮어내는 것이라면, 철학의 중단은 자신을 조건짓는 진리 절차들 사이의 경로 또는 지적 순환의 체제를 정의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제한되거나 봉쇄되어 있다는 것에서 야기될 수 있다. 그러한 봉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시대에 대한 사유가 행해지는 공가능성의 공간을 수립하는 대신에, 철학이 자신의 조건들 중 몇몇에 자신의 기능을 위임하는 것, [다시 말해] 철학이 사유 전체를 하나의 유적 절차에 내맡기는 것이다. 그때 철학은 그 절차를 위한 자기 자신의 폐지라는 요소 속에서 실행된다."(93쪽)
바디우가 보기에 철학의 위험은 '봉합'이라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철학이 시, 수학, 정치, 사랑 가운데 어느 하나에 봉합된 것으로 나타날 때 철학은 중단되고 만다. 철학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모든 봉합은 과장이다. 19세기 철학은 이미 실증주의적 봉합 혹은 과학주의적 봉합을 당한 바 있다. 과학적 조건(실증주의)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단지 분석적 추론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정치적 조건(마르크스주의)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혁명의 나팔수로 전락했다. 예술적 조건 혹은 시적 조건(니체부터 오늘날까지)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시학의 물신숭배자가 된다. 그럼, 사랑의 조건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어찌되는가? 아직 시기상조인 듯, 바디우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철학이 사랑의 조건에 봉합될 때, 철학은 정신분석학으로 변신한다. 실제로 바디우의 눈에 비친 프로이트와 라캉은 위대한 철학자였다. 특히 라캉을 욕망이나 주체의 이론가가 아닌 사랑의 이론가로 변모시킨다.
바디우는 철학이 시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보았다. 바디우는 횔덜린 이후 과학에 봉합된 실증주의 철학을 대신하여 존재의 문제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대'에 주목한다. 특히 하이데거 이후의 시기는 철학이 시에 봉합된 시기로 간주된다. 바디우가 미학이 아닌 '비미학'을 옹호하는 이유도 바로 시적 조건에의 봉합을 피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