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은 내게 있어서 어떤 절실한 필요에 의해 수없이 반복해서 읽은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삶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으로 인해 무지하기 그지없는 내적(內的)상태에 도달하는 길을 찾으려는 간절함이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칼 구스타프 융’이 쓴 「무의식에 대한 접근」은 분명 이러한 내게 접근가능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꿈의 기능은 심리적 평형 상태 회복”이라는 정의이다. 아마 ‘프로이트’의 “꿈 상징의 원인은 억압과 욕망충족”이라는 주장의 연장이었다면 이 책은 결코 인연이 없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즉, “꿈은 하나의 사실이자 무의식 고유의 표현”이며, “정당한 이유에서 생겨난 인과(因果)적 현상”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꿈 자체에 대한 사실적 가치의 부여라는 무의식 접근로(接近路)로서의 꿈의 발견이다.
마음의 표출인 ‘의식’, 그리고 의식에 끝없이 정보를 보내는 ‘무의식’이 발설하는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본능의 영역에서 분리되어버린 의식이외에는 무지했던 내 마음에 다가가는 하나의 길을 찾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은 60년에 걸쳐 이룩한 ‘꿈과 상징’의 연구를 정리한 융 심리학의 입문서로서 꿈과 무의식, 통과의례, 집단 무의식, 마음의 성장패턴,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 등 개성화 과정을 비롯한 상징의 심리적 기원과 사례분석, 현대 물리학과 무의식의 상보성에 이르는 꿈의 상징성 연구의 걸출한 집약서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분석심리학에 대한 현학적 호기심만으로 대하기에는 오늘의 세상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의 회복, 차단된 잠재적 역량의 발견과 같은 인간에 대한 정말의 공부를 놓칠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무의식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어머니와 같은 대지” 혹은 “태모(太母)”로서의 나무와 같은 ‘물질’이 지닌 정서적 의미를 말하면, 이를테면 나무(木)나 돌(石)에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거나, 달 정령 운운하면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렇듯 관념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몰아내고 무의식과 단절되어 버렸다.
1. 무의식의 존재성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은 이러한 정서적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심리적 균형이 무너지면 의식에 정보를 보낸다. 다만, 의식이 이 신호를 받아 들일지, 억압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무의식의 존재는 부정되거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주체는 터무니없다고 반박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 분열 증세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분리된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식적 내용이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되살아나거나, 한 번도 의식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일상에 필요성이 사라지거나 불편한 것이어서 억압하여 치워버리거나 의식 속 모든 개념은 그 자체의 심리적 연상으로 무의식속에 침잠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스며든 냄새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옛 기억을 되살려내는 무의식의 존재를 알린다. 또한 우린 직관적으로 ‘뭔가 있는 것 같다.’라든가, ‘왠지 수상쩍다.’처럼 잠재적 지각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영감(靈感)’으로 천재적인 문학, 철학, 예술작품은 물론 과학적 발견에 이르기도 한다. 무의식에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상실했지만 무의식은 이렇듯 인간 의식의 표층에 불현 듯 나타나 그 존재성을 알린다.
2.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다
그런데 마음의 평형을 잃어 내적상태를 헤아려 그 불균형의 소재를 이해하고 싶어도 현대인은 알 도리가 없다. 아마 융의 공적은 이것이라 할 것이다. 프로이트를 넘어서 ‘꿈’ 자체가 무의식의 사실적 표출임을.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 기법’을 통해 억압된 욕망으로서의 꿈을 해석하는 데 그쳤지만, 융은 상징적 이미지로 구성된 꿈 자체가 꿈 꾼 사람의 심리적 균형 회복을 위한 사실로서의 현상을 말하고 있음을.
꿈의 분석을 통해 잊었던 본능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꿈은 이해하기 어렵다. 의식적 마음이 하는 이야기와 다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꿈은 직접적으로 시원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불쾌한 생각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잠을 보호하기 위해 이미지를 왜곡하고 변질시켜 참된 주제를 은폐시키는 ‘검열 기관’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융은 이것이야말로 무의식 상태에서 취하고 있는 본질적 상태라고 반론한다.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난 심리에너지 그대로의 표출로서 당연한 표상인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꿈은 원시적 사고나 신화, 제의(祭儀)와 비슷한 이미지나 심리적 연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고통스러운 잔재’라고 기억의 찌꺼기로 해석하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잔존해 온 심리적 요소, 즉 ‘원형’, ‘원시적 심상’으로서 잃어버린 정서적 관념의 중대한 맥락을 제공하는 예지로서 분석한다. 이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상으로 형상시키는 본능적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융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상징’의 이해는 꿈 분석의 핵심 토대가 된다.
3. 왜 무의식의 이해가 필요한가?
융은 현대 문명사회가 무의식과 소통하는 법을 상실함으로서 자연의 일원인 인간이 의식의 무지함과 교만으로 자연과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고 마침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자기네 합리주의가 인류를 심적인 지하세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무의식에 은밀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계획이나 결정에 몰래 개입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는 심리적 무능상태에 빠져있는 인간과 인간사회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 사회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개인의 정서적, 도덕적 자질에 달려있기에 통계적이고 평균적인 실재하지 않는 인류라는 추상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유일한 현실인 ‘개인’에 대한 본질적 이해만이 생명의 연속성, 행복, 평화, 안정적 삶의 유지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조한다. 그래서 융은 탄식한다. “정신이었던 것이 지능과 동일시되고,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는 지능이라는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고.
인간의 마음(무의식)에는 온갖 진화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여기에는 개인의 콤플렉스라는 개별적 역사가 있듯이, 원형의 성질을 띤 사회적 콤플렉스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인류 전체의 고뇌와 불안에 대한 축적된 정신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이 무의식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비인간화되고 오직 지적 관념에만 몰두하는 무미건조함과 물신화로 타자에게 상처를 주고, 독선과 기만에 찬 이기심을 양육한다. 무의식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만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변화를 시작해야 타자도, 사회도 변화 할 것이다. 무의식의 이해는 오류와 왜곡과 무지를 바로잡고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 된다. 우리 세계는 신경증 환자처럼 분열되어 있고 언제나 적대자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한다. 자신의 그림자와 사악한 행위인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본성을 제어할 방법조차 모르고 있지 않는가? 융의 꿈과 상징에 대한 언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 ‘자기’를 둘러보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