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부딪치는 무수한 선택을 통하여 삶의 흔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선택 가운데는 점심때 무엇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는 소소한 것들도 있지만, 때로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과 같이 인생의 흐름을 바꾸는 중대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마음을 정하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자신의 느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선택순간의 느낌에 따라 결정하고,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를 토대로 결정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초월적 존재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인간은 이미 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운명론자의 경우는 선택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에게는 그릇된 선택까지도 허용하는 선물을 주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라고 하는 자유의지론입니다. 즉,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신의 구속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가치있는 행동에는 반드시 신의 은총이 뒤따른다는 논리로 자유의지의 남용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뇌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하여 조사해보았더니 자유의지의 실재가 의심된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샘 해리스 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yes24.com/document/7110006>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행동을 상상하고, 그 행동들을 선택한 자기 나름의 논리를 심사숙고하며, 이러한 심사숙고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모순된 욕망들에 직면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역량의 집합’을 자유의지라고 본다면(샘 해리스 지음, 자유의지는 없다, 53쪽, 2013년), 자유 의지의 관념을 전제하는 “1.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2.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13쪽)”라는 두 가지 가정이 틀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라는 데이터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자신의 환자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그것은 하워드의 뇌에서 비자발적인 화학물질의 변화가 일어난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었다.(스캇 펙 지음,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 122쪽; http://blog.yes24.com/document/7111849)”라고 적은 스캇 펙 박사처럼, 저 역시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신경세포가 활동을 하더라는 뇌신경생리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저자가 ‘자유 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 다소 성급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을 전공한 뉴욕대학교 스턴경영대학원 마케팅학과의 애덤 알터 교수가 쓴 <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원제; Drunk Tank Pink)>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색깔, 공간, 온도, 남의 시선, 편견, 문화, 상징, 이름, 그리고 명칭 등과 같이 전혀 의외의 힘들이 우리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힘이 미약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이런 조건들이 놀랍게도 인간에게 미치는 힘이 강력하더라는 사실을 다양한 심리 실험과 자료 조사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시 미화를 개선하기 위하여 가로등을 푸른색으로 교체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시에서는 수개월이 지난 뒤 범죄행위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용하여 색체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도 눈길을 끌었습니다만, 저는 물론 저의 리뷰를 읽는 분들은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파올리 기념병원의 사례에 관심이 더 갈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이 병원에서 담낭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입원하고 있던 병실이 회복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보았더니, 창문을 통하여 작은 낙엽수가 내다보이는 병실과 커다란 벽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병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은 각각 입원기간에서도 차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통증이나 우울한 감정의 정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자연경치를 바라본 환자들은 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보다 네 배나 더 빨리 회복된 셈이었다’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처럼 저자가 의료와 관련된 사례들을 자주 인용하고 있어서 참고할만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대다수 동물들이 제한된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존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반해, 인간은 때때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어떨 때는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인 끈을 이용해 자신의 동기를 충족시킨다.(158쪽)”라는 설명을 달아 편견이 우리의 생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왕따현상이나 유색인종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편견이 때로는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져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평소 사고가 특정한 방향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앤서니 그린월드와 마자린 바나지는 이러한 편견, 즉 숨은 편향을 “사회 집단에 대한 ‘지식 조각들’이다. 이 지식 조각들은 뇌에 저장된다. (…) 숨은 편향은 일단 정신 속에 자리 잡으면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을 향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영향을 전혀 모른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앤서니 그린월드와 마자린 바나지 지음, 마인드 버그, 15쪽 ; http://blog.yes24.com/document/7580708) 기억이 편향된 사고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평소에 편향된 지식을 기억에 담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지도; http://blog.yes24.com/document/7456117>에서 리처드 니스벳교수는 공자로 대표되는 동양인의 사고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논하였던 것처럼, 저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문화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문화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하고 있는 ‘생각을 만드는 문화’의 내용을 “현대 서양철학의 토대가 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을 맥락과 분리시켜 분석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은 사물과 맥락의 관계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차이는 서양인과 동아시아인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의 차이로 계속 나타나고 있다.(196쪽)”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국인과 접촉할 때는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왕래가 잦아지고 인터넷이라고 하는 혁신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문화적 차이가 좁혀지고 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알터교수는 부정적 상징이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례로 나치의 십자기장과 관련된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 미군은 샌디에이고만 실버해안에 위치한 해군의 코로나도 기지에 6동의 건물을 세웠는데, 지상에서 바라보면 별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병영건물에 불과한 이 건물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나치의 철십자 기장을 연상시키도록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샌디에이고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존 모크는 공중에서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면서, 4개의 ‘L’자 모양을 이루도록 건물 여섯 채를 배치한 것에 불과하여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지만, “어쨌든 이것이 그 불명예스러운 상징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240쪽)”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나치의 철십자 기장은 불교의 상징인 만(卍)자와 유사하지만 십자에서 굽어지는 쪽을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스와스티카(Swastika)라고 하는 만(卍)자는 ‘행운의’ 또는 ‘상서로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http://blog.naver.com/riverinkch/20033794523) 만(卍)자는 고대 아리안족의 종교적 상징이었는데, 유럽으로 흘러든 아리안족이 지금의 독일민족이며, 다른 일파는 인도 쪽으로 흘러들어 인도계 아리안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치가 세력을 키울 무렵 히틀러를 만나 영향력을 미치게 된, 뮌헨대학교 지리학과의 카를 하우스호퍼교수는 티베트어에 정통했고 라마교승려들과 깊은 교분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만(卍)자가 티베트 지방에서 주술기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게르만민족과 고대 아시아의 신비한 힘을 결속시키려는 의도로 철십자 기장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반크리스트를 내세운 나치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를 꺽은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나치의 철십자 기장과 유사한 문제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의 하나인 일본에서는 최근 아베 총리가 집권한 이후 일본 사회가 빠르게 우경화되고 있어,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시각이 국제적으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운동경기장에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휘두르는 일본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일본 내에서 혐한 시위가 확산되고 있어 양심적인 시민사회가 위기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나라여자대학의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85) 명예교수는 전후 일본 정부가 왜곡된 역사교육을 해온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의 왜곡이 심했는데, 그 이유를 “한국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면 일본의 제국주의 열강으로의 도약은 불가능했다. 45년 도쿄대 총장으로 임명된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1893∼1961)는 일본이 대만을 식민 지배한 과정은 책으로 남겼지만 조선을 지배한 과정은 쓰지 못했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일본의 모순을 너무 많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과제였기 때문이다”라고 들며, 한국 침략의 본질과 의미, 이런 것들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합니다(2014년 3월 1일자 중앙일보 기사, “아베,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너무 모른다”) 이웃의 일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나몰라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싶지만 방법이 없으니 예의 주시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요?
저자가 <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을 통하여 읽는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주 작은 차이가 엄청난 생각을 만든다’라는 마치는 글의 제목에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흔히 ‘나비 날개짓’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1961년 미국의 저명한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1년 전에 만든 일기예보 모형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지루하게 자료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소수점 6자리로 되어 있는 예측모형 입력자료들을 소수점 세 자리에서 끊어서 입력해본 것인데, 대단치 않아 보이는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기예보모형은 이전 것과는 아주 딴판인 결과를 예측하더라는 것입니다. 즉 기온이 1도의 100만분의 몇이 바뀌었을 뿐인데 쨍쨍한 햇살 대신에 비가 쏟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몇 년 후 로렌츠는 어느 강연에서 이때의 깨달음을 청중들에게 전했는데, 그 강연의 제목이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한다?”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수없이 많은 작은 나비효과들의 집합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사고와 느낌과 행동은 아주 복잡한 연쇄반응들의 산물이고, 이러한 연쇄반응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아홉 가지의 힘들에 의하여 심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거나 극복함으로써 더 건강하고 지혜로우며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