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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차라리 당신을 위해 부르짖는 초혼(招魂)이어라...

글쓴이: REMEMBER 0416 | 20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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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 봉빈...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인물의 재해석이야 문학이 늘 해오던 것입니다만 소설 '채홍'이 보여준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새로운 해석은 그동안의 굳어졌던 역사적 인식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문학이 이렇게도 현실을 능가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 이전에 이미 '봉빈'을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면 저와 비슷한 감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물론 저도 이 소설의 주인공 '봉빈'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역사를 좋아했던 저는 전공도 아니면서 '조선왕조실록강해'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선 역사에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레즈비언이라면서 교수님이 바로 이 '봉빈'을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봉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물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인지라 조용한 장차 문종이 되는 세자와는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런 문종이 후실들을 더 찾고 그 중 하나가 결국 임신을 하게 되자 질투심에 거짓 임신을 꾸며대질 않나 틈날 때 마다 몰래 외간 남자를 엿보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지 않나 정말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세자빈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봉빈이 결국 폐출되어버린 계기가 된 동성애를 뜻하는 '대식(對食)'도 정말 그런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폐출시키려다 보니 마땅한 구실이 없어 혹시 조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소설 '채홍'에서도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궁내에서 궁녀들끼리의 '대식'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고 하니까요. 저의 뇌리 속에 그렇게 박혀있던 봉빈이었기에 사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온 이가 설마 그 '봉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설 '채홍'에 처음 등장하는 봉빈은 그야말로 그 때 그녀가 직접 만져보기도 했던 가을 국화 처럼 차분하고 단아해 보이기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늘 저의 기억 속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같은 인상으로만 남아있던 봉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에서 보여준 성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세종과 조용하고 어질어서 준비된 임금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세자에게 그야말로 가해자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단죄하려 드는 오라버니들 앞에서 절규처럼 쏟아내었던 그녀의 말 그대로 본심을 몰라주는 무정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뿐이었으니까요.


  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다름이 참으로 인상 깊었고 그 다름의 연유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저는 얼른 뒷 페이지를 넘겨 봉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습니다. 김별아 작가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그 모든 게 사실 우리 내부에 간직된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리려는 그녀 자신의 호소라는 사실을 말이죠.


 


 


  2. '채홍'의 '봉빈'이 달라야 했던 이유...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선입관이 있습니다.


  선입관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데 때로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리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듯 합니다. 근대 독일의 역사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란 진짜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입맛대로 거짓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바꿔서 기록할 수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네, 지금에서는 역사가 순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입니다. 시쳇말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죠. 그렇게 승자의 입장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게 바로 역사이고 오늘 날 그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패자들은 때로는 삭제로 지워지는 것이고 때로는 왜곡으로 본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릴 목소리를 잃게 됩니다. 자고로 이것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나 동성애자 등 모든 '약자'이며 '소수자'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된 역사가 아닌 공식 문헌이나 문학, 혹은 민담 그 뿐만 아니라 세금 계산서나 가게 장부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통하여 공식적 역사가 지워버리거나 왜곡한 목소리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금 발굴해 내는 데 오히려 더 치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로 이 소설, 김별아 작가의 '채홍'도 문학이지만 바로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별아 작가가 실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기도 합니다.


 


 


  2 - 1.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다름의 의도...


 


 그녀의 이러한 동기는 소설 도입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기에 흥미를 자아냅니다. 보통 구성상의 특이함은 그대로 작가의 의도인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채홍' 소설의 도입부에는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이란 정작 주인공인 봉빈이 등장할 때 까지 우리는 총 세 단계를 지나가야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가로 돌아왔을 때 봉빈을 바라보는 오라버니의 마음에서 봉빈의 주변 인물이라 할 만한 박나인과 결국 그녀를 고발하는 임무를 맡은 김태감을 거쳐 결국 봉빈에게 이르게 되는데요. 왜 작가는 이렇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을까요? 바로 거기에 김별아 작가가 실록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시각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 단계의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에 공통점이 있음이 분명 보게 됩니다. 바로 그 공통점이 김별아 작가가 그리했던 이유를 거꾸로 밝혀줄 터인데 그 공통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봉빈이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왔을 때 오라버니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에서나 그 뒤 '숨어있는 꽃'에 나오는 '열녀' 혹은 '정절'이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관념을 의식 깊숙이 내재화시키고 사는 박나인( 또한 이 박나인은 흉금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봉빈과는 얼마나 정반대의 인물입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김별아 작가가 박나인을 두 번째로 등장하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의 모습에서나 마지막으로 다음 '불의 멀미'에서 내시라서 몸으로는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아내가 행여 그 때문에 바람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결국 지속적인 폭력으로 자기 아내의 욕망을 길들이려 드는(이것은 그대로 '몸'은 없고 오로지 '말'로써 여성들에게 강압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가부장적 유교적 관념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김태감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히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역사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남성이 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보단 먼저 오히려 지배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길들이려 하며 그것은 바로 여성에게 가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으로 김별아 작가는 실록이 쓰여 진 당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라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러한 관계 위에서 공식 기록이라며 등장한 것이 '실록'이었기 때문에 김별아 작가는 실록의 봉빈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태감에서 잘 보여지듯이 남성들은 여성들이 두려우면 두려울 수록 오히려 자기가 아니라 여성탓을 하며 그렇게 더 '괴물적'인 것으로 만들어 자꾸만 더 가학적이 되는 폭력 행사를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일쑤이니까요. 그러니 김별아 작가는 실록 역시도 똑같은 색안경을 쓰고 봉빈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서 실록에서는 '준비된 임금'이라며 칭송해 마지않는 문종 또한 이제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김별아 작가에게는 한낱 가부장적 유교적 관념에 완전히 세뇌되어버려 여성과는 제대로 진솔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반편'이며 뼛속까지 '법도'에 물든 나머지 융통성이라든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정해진 매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법도 기계' 이상의 존재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능력으로나 인품으로나 그만큼 준비된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 하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 단종을 그렇게 죽게 만든 애석한 임금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요 소설'채 홍'을 읽으면서는 '과연 이 소설이 그려내는 만큼의 강박증과 소심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단종의 비극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만큼 김별아 작가가 그려내는 문종 또한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3. 다르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유...


 


 그래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점철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지워지고 왜곡된 봉빈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려 한다면 실록에 기록된 것에 좌우되지 않고 단순한 사실만을 취하여 그것을 지금까지의 남성만의 관점이 아닌 온전히 여성만의 관점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 새롭게 형상화해야 했을 터이니까요.


 


 결국 역사란 기억의 문제입니다.


 역사란 따지고 보면 훗날 전해주고 싶은 기억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별의 주체가 오로지 남성뿐이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이해하려는 남성이 아니라 '열녀'나 '칠거지악' 같은 것으로 여성이란 무조건 남성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남성들로 말이죠. 그래서 마땅히 이 김별아 작가가 소설 '채홍'에서 했던 대로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편협한 남성들의 손에 의해 지워지고 왜곡된 여성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되살리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서 는 말이죠. 때문에 '채홍'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문종과 봉빈으로 대표되는 '법도'라는 이념과 '사랑'이라는 개인의 욕망간의 대립은 차라리 그 목소리들을 되찾기 위한 투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도가 그대로 체화된 인물인 세자 ' 문종'은 그대로 이념이 가진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단 봉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함에서 오는 서운한 감정의 표출도 법도로 마땅히 교정해야 할 시기 많은 아낙네의 잔소리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강요만 합니다. 끝내 듣지 않으면 그냥 피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이건 그대로 법도로 대표되어지는 이념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이념도 들으려는 귀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을 그 뜻대로 맞추는 말을 하는 '입'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오로지 자기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책하면 정작 잘못을 범하고 모자라는 것은 당신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역정부터 냅니다. 그리고 이념은 자신이 아는 만큼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고 피하려듭니다. 문종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봉빈은 문종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성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봉빈 앞에 서면 왠지 스스로 왜소해짐을 느꼈고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이념은 자신의 통제를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념은 더욱 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태감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가했던 폭행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게 한계에 이르면 이제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문종은 봉빈에게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리죠.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이념에 빠져 유태인의 생명을 깡그리 무시했던 나치와도 같이 말입니다. 문종의 모르쇠와 나치의 학살.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은 그리 지나친 비유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념의 본성엔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나 이해의 노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자란 얼마든지 쉽게 제거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문종이 봉빈이 폐출될 때 쉽게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은 이런 면에서 문종이 봉빈을 바라보는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을 바라보는 것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약자나 소수의 목소리들을 그리도 쉽게 지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게 이념을 향해 나를 인정해 달라는 욕망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전체에로의 합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념 자체가 전체성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념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란 전체성에 매몰되지 않는 그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냥 날 그 무엇도 아닌 고유한 나 자신으로 보아달라는 그런 욕망입니다. 봉빈이 문종에게 드러낸 것도 그러하지 않았던가요? 법도에서 움직이는 세자빈이 아닌 문종을 향한 애틋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원래 이름인 '란'이라는 자기 자체를 보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김별아 작가는 점점 '사랑'을 강조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조선의 유교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과의 동성애 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역사적 사실이었다 해도 분명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당시의 가치관을 가장 전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가져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념으로는 도저히 포획될 수 없는 개인 욕망의 고유성과 거기에 그대로 빗대어질 남성들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온전히 여성들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대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란 어떤 존재들입니까? 흔히 우리들은 가장 여성다운 인물로 신사임당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그 신사임당은 알고 보면 남성 중심의 유교적 관념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여성성의 대표일지도 몰라도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성들이 뒤집어씌운 굴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김별아 작가가 따지고 보면 실록에서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던 '봉빈'을, 거기다 조선의 문화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여성들만의 동성애를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 이제 여성중심의 시각으로 다시금 새롭게 여성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역사학자들이 거세게 하고 있는 '공식적'이란 미명 하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되찾아주는 것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만 '채홍'이란 이 소설은 사랑을 강조하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그토록 강조되는 사랑이란 사실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시선과 존재로서 충만한 여성성에 대한 상징과 같은 것으로 말이죠. 때문에 소설 '채홍'의 마지막에 유언처럼 남겨진 봉빈의 이 마지막 말,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행여 그 때도 사랑이 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랑으로 죽으리라는 것을.(p.319)'


 이 또한 그 궁극적 의미에 있어서는 고유하고도 진정한 여성성을 간직하리라는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4. 이제 전혀 새롭게 쓰여지는 여성 중심의 역사를 향하여...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로서의 봉빈


 


  김별아 작가의 소설 '채홍'이 정말 놀라운 것은(이 글이 '놀라웠습니다.'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제 다시 소설이 빚어낸 봉빈의 모습을 살펴보면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는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봉빈의 모든 행위들이 이렇게 다시금 되찾으려 하는 여성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모든 게 그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문학만이 기억할 수 있다.'고 김별아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온전히 기억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원래 여성은 기억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Memory의 연원이 되는 기억의 신인 '므네모시네(Mnemosyne)도 여신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인 대표적 작가이기도 합니다. '햄릿'에서의 햄릿 어머니처럼 세익스피의 연극 대부분에서 여성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숨겨진 진실들을 기억하는 존재들로 나오죠. 다시금 새롭게 소설 속에서 묘사되어진 봉빈의 행태들을 살펴보면 봉빈은 마치 이 므네모시네의 화신과도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봉빈이 술을 벗하게 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별아 작가는 주의 깊게도 봉빈이 남성 사회에 자신을 편입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이 좌절되었을 때 비로소 술을 마시게 합니다. 바로 거짓 임신이 그것이죠. 문종의 관심을 가지려면 오로지 임신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징후가 있자 무턱대고 믿어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만(그러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과실에 의한 착오였을 뿐이죠.) 그건 그녀가 문종으로 대표되는 남성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자 여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상임신으로 판명 나고 봉빈은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오명 속에 고립됩니다만 사실 그 고유의 여성성에서 보자면 이것으로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봉빈은 그 때 가서야 술을 마셨습니다. '진실할수록 추하고 솔직할수록 퇴폐적인'이라는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의 첫머리에 봉빈이 술에 대한 느낌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요상키도 하다. (...)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 씻긴 듯 지워지며 초라한 나는 내가 아닌 무엇으로 사라진다.(p.184)'


 


  여기서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란 남성 사회에 억지로 스스로를 편입시키려던 기억들이며 '초라한 나'는 그러했던 봉빈 자신을 말합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물들었던 기억과 자신이 이제 술로 인해 사라지고 다시금 되찾은 여성성의 자아로 그녀는 다시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술이 목을 넘어갈 때 홧홧한 자극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게 처음 술을 마실 때 그녀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감각이 등장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감각만이 남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지배하던 모든 이념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그녀가 조선의 모범적인 여성상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격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행보입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있어서는 전복적으로만 보여 질 수밖에 없는 파격으로 고유한 여성성에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며 그 기억을 다시금 써 가는 것입니다. 그녀의 술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므네모시네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 여신은 기억의 연못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하죠. 그렇게 봉빈의 술은 므네모시네의 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술을 계속적으로 마신다는 것은 되찾은 고유의 여성성을 계속해서 되새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5.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초혼(招魂)


 


 소설의 제목인 '채홍(彩虹)'은 무지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김별아 작가는 왜 그걸 제목으로 택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 (p.322)'


 


 이제는 아셨겠지만 지금 저의 리뷰는 이 말을 조금 상세하고 길게 써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김별아 작가의 말에서도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그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진 여성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저는 이렇게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좌우되지 않고 온전히 그만의 시각으로 그것도 보다 확고한 주제 의식에 기반 해서 과감히 써 내려간 이 소설을 참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내부에 던지는 하나의 호소라고 했습니다만 과거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존재들을 다시금 불러내 새롭고도 온전한 생명을 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실 '초혼(招魂)'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초혼'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왠지 절박하면서도 애타는 듯한 김별아 작가의 이 초혼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세 가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를 편견 없이 대해야 하고 그 모든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것을 위해서라는 세상 모두가 반대하는 편이라 해도 기꺼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소설 '채홍'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위한 당신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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