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 즐거워서 못살겠어요
달이 가는 게 해가 가는 게 행복해서 못 살겠어요
이제 겨우 ***일 남았네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조금만 더 웃으면서 견뎌내어요
좋은 날이 오고 말거야
설운도의 <원점>을 편곡한 것으로 들리는 ‘나꼼수’의 트로트 로고송(신곡)이다. 봉주 8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이 노래가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그 날까지 몇 일이 남았는지 까마득해서 일까. ‘나꼼수’에 출연한 MBC PD는 자신들도 매체가 있고 뉴스를 전달하는 어엿한 창이 있는데 거기서는 말 못하고 지하에 와서 떠들고 있으니 잠시 울컥하는 것 같았다. 사장이 퇴진하는 그날까지 끝장파업에 돌입한다는 PD의 목소리는 결연하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달까.
주말에 ‘무도’와 ‘나가수’를 보지 않았더니 한층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시간이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의 파업은 내게 여가의 파업을 유도했다. 우리야 두어 시간 웃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파업하는 당사자들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일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영구적으로 파업이 불가능하다. 권력의 주체는 자본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무거운 책을 들고 만다.
이 책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유명한 박세길의 신간이다. 500p 분량의 꽤 촘촘한 사회과학서이지만 대부분 쉬운 용어로만 단계적 논리를 펼치시는 덕에 에세이처럼 술술 넘어가는 기특한 책이다. 내가 무리 없이 모두 이해했으니 나 같은 아줌마들도 충분히 흥미롭게 펼쳐들 수 있을 듯 하다. 가장 훌륭하다 생각되는 건 궁극의 질문과 최종적 답안 사이에 치밀하게 펼쳐지는 논리의 향연이다. 아주 세세하게 쪼개어 그것을 항목마다 밀도 높게 분석했다. 각종 통계자료는 기본이다. 그리고 다시 조직적으로 완성했다. 완벽을 기울인 교과서의 느낌도 나는데 신기한건 지루하지가 않았다는 것.
쏟아져 나오는 서사와 위로의 책을 접고 이 책을 꼼꼼히 읽게 된 이유는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은 치는데 이게 최선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답은 있는 가였다. 적어도 내가 만나온 사람 중에 온라인이건 오프이건 자본주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모두 다 이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절망이고 살아갈 날이 암울하다 말했다. 분단국가인 이 땅 한국에 사는 한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없고 지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생각만 하면 서글프다 말했다. 좋은 날이 언제이고 어떤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 저 노래에서 좋은 날이 온다는 건 그들의 바램대로 정봉주가 나오고 MB가 들어가는 날일까 - 그때라면 고통이 끝나는 것일까. 과연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린, 그냥 웃고 말지요, 왜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요, 일 것이 틀림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언제까지 인 것인지. 나는 돈이 있는 사람이었다가 망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돈이 개인에게 어떤 실력행사를 하는지 잘 안다. 돈은 사람의 인격 수준까지 결정하는 위력이 있다. 돈이 많으면 보다 착하고 우아한 사람이 될 기회가 많다. 성격도 좋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보일 확률도 많다. 돈이 많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이 꼬인다. 어떻게든 돈 많은 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그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틀려진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없어지고 친척도 멀어진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사람 곁에 본능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해보면 미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는 뜻밖의 수확도 있다. 처음엔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돈 떨어졌음을 처절하게 깨우치는 순간은 돈 때문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매일 같이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 매일 마시던 커피가 떨어졌을 때,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샴푸가 떨어졌을 때, 눈가의 주름이 뭐 중요했다고 찍어 바르던 화장품이 떨어졌을 때, 휴지도 치약도 세제도 떨어져서 어제까지 잘 하던 일을 오늘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이런 것들을 생필품이라고 하던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고 하던가. 아침에 일어나 기분에 따라 양치질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고 치약이 없으면 이빨을 못 닦는데 돈이 없으므로 그 필수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돈이 생기게 되면 나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사게 되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일이란 거창한 도덕이나 희망이나 사랑 혹은 그리움 따위의 돈 없어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아주 사소한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사람이 참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사정없이 겁탈할 때 인 것이다. 즉, 돈이 없으면 그 없어진 돈 때문에 사람을 알게 된다. 돈 있을 땐 나부터 시작해 내 돈에 가려 잘 안 보이던 그들이 보인다.
문제는 돈이 없으면 사람이 보다 잘 보인다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유혹은 어쨌든 우리 주변에서 돈 많은 사람을 본다는데 있는 것이다. 코스닥으로 떼부자가 되어 타워 팰리스로 이사를 가는 동료를 목격한다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부동산 시세차익을 챙겨 벤츠를 사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청담동 카페 골목을 지나다 보면 남편이 의사인 사모님들이 죄다 외제차를 발레파킹 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는 것이다. 대기업 계열사쯤 되는 집안에 시집간 동창이 자주 간다는 (희한한 이름의)호텔은 식당이 회원제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암 것도 아닌 나는 맛있다고 해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재력이 좋아 결혼할 때 집이라도 장만해준 동료는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꼴을 어김없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분이 씁쓸해 우연히 틀어본 TV에서도 일등한 사람에게만 상금이 왕창 몰아 터지는 서바이벌 게임을 두 눈으로 일주일 내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잘 살고 가진 거 나누는 나라가 될 줄 알았는데 이 놈의 엠비정부는 승자독식의 끝장판인 대기업 논리와 땅 파고 벽돌 쌓는 불도저식 개발과 등수에 집착하는 일등주의만 좇아가느라 나라를 다시 쌍팔년도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원전은 일본을 의식해 수주되어야 했고 G20 의장 국가는 기어이 되어야 했고 평창은 삼수라도 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어떻게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진국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은 런던을 좇아가야 했고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벗고 PT를 해야 했다. 유럽과 미국에 극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프랑스 소녀들이 피켓을 들고 우리 아이돌 공연을 연장하라고 시위를 할 때 얼마나 짜릿했던가. 여기선 삼성 욕을 열나게 하다가도 뉴욕의 타임 스퀘어 광장에 하루 종일 빛나고 있는 삼성과 LG 로고는 그런대로 기분 나쁘진 않았던 우리. 부지런히 따라가고 숨차게 도망가느라 여튼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것 같다.
근데, 그럼 뭐하나.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우린 속으로 썩었는데. 미국의 일본의 안 좋은 점은 그대로 사이좋게 복제해 썩어가고 있는데. 우린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져도 휘청하고 일본에서 쓰나미가 닥쳐도 흔들리는데. 중국과 미국이 팽팽하면 우리가 더 긴장해 뒤돌아 호들갑인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예부터 사대와 자주를 줄타기 해온 눈치 빠른 민족이었다. 물자와 자원은 적은데다가 성격은 조급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일찍 터득하느라 늘 그들의 동향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유달리 의식하고 그런 남들 눈에 나지 않으려고 자기검열을 하는 습관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전쟁이 적어 내부에서 ‘편가르기’에 치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쟁이나 내전이 많지 않았기에 임진왜란이나 일제침략,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그로인해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이분법 논리는 좁은 남한에서 다시 되지도 않는 이념싸움으로 확산되고 우리는 허구헌 날 좌와 우로 구분된 시각의 뉴스만 보고 산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총선, 대선,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이 물갈이 하는 해인데 미국은, 프랑스는 누가 대통령이 될까. 아니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경제는 어떻게 되고 집값은 어떻게 되고 물가는 교육은 언론은 ... 소녀시대는 언제까지 소녀로 살 것인가, 무도는 언제 방송되나, 정봉주는 언제 석방되나, 강호동은 언제 컴백하나... 아 봄은 오는 것인가. 나는 다시 재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거창한 생각을 아니 아무리 시시콜콜한 생각을 해도 역시 지난 2년 동안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지금의 추락한 내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달려온 세월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공부 덜하고 일 좀 덜하고 남들 놀 때 놀고 여행이나 가고 살 것이지 뭐 하러 아득바득 열심히 살았을까, 였다. 그렇다.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주저앉기 전에 열심히 살았던게 억울해서라도 꼭 재기 하고 싶었다. 이기는 놈이 다가지는 세상, 한 번 지면 땅 끝으로 추락하는 세상, 한 번 추락하면 인생 실패하는 세상, 돈 없으면 능력 있는 게 더 서러운 세상, 더 살아봐야 더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은 끝이 나길 바랬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세상은 이제 끝난다고 말한다. 반드시, 확실히, 자본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외친다.
저자는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2007년 홀로 나와 치악산 기슭에서 10만 페이지 독서를 하고 그는 좌우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야 했다. 오랫동안 좌파적 시각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시각을 버리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겠다는 지적 오만을 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과연 좌우 대결구도는 얼마나 타당하고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지닌 것인가 자문했다. 기실 좌우대결 구도는 역으로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어왔기에 이대로 가다간 결국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어질 것이라 충언했다. 사실상 좌우 대결구도는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중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신세대 창조자 -디지털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 80년대 이후 출생하여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세대 -들에게도 더 이상 좌우대결구도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좌와 우로 자꾸 이분법화 하는 것은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야 자기들이 더 유리한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마지막 고집일 뿐이다. 나머지 중도자들은 좌와 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와 우가 모두 답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새로운 답을 찾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서있기만 하던 안철수를 대안으로 보았겠나.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 진정한 진보는 좌우구도 속에서 좌파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데 있다고.
역사의 진행방향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세대라 말하기엔 늙었고 기득권 세대라 하기엔 아직 젊다. 우린 언제나 낀 세대였다.(우리가 언제 제대로 뭔 세대를 주도하긴 했나)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세대와 기득권 세대와 마찬가지로 같다. 이 책을 좀 근사하게 리뷰를 해보려고 정리를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다 요약하고 보니 A4로 19장이었다.(그래서 근사하고 설득력있는 리뷰는 포기한다) 이틀 동안 내가 한 일은 무슨 교양 리포트를 써내는 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흥분된 시간이었다. 그가 말하는 ‘상생의 인본주의’는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변화가 마침내 자본주의를 멸하게 하고 전혀 새로운 가치로 이행하는 과정을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승자독식의 대항가치로 상생을 내세웠고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고 상생을 앞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운동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희망으로 느낀 것은 지식근로자의 정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처럼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인 것이다. 고용, 피고용의 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가 결국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력기반의 경제에서 생산수단이 창조력이 된다면 그 자체가 영구 파업을 상징할 수 있다. 더 이상 노동자는 통제 대상이 아니고 협력관계의 파트너가, 나아가서는 주총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지배 권력은 생산요소를 가진 창조자들에게 이동할 것이고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좌파혁명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삼성의 힘은 이미 국가를 능가한지 오래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도 다시 언젠간 규제를 해제하는 것의 전 단계일 뿐이다. 국가는 자신을 지양하고 시장은 스스로 초월하고 구성원은 국가와 시장이 아닌 자신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시장에 의지하는 ‘쫓기는 삶’이 아니고 국가에 의존하는 ‘기대는 삶’도 아닌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삶으로 모두 이동하는 것. 물론 이는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린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의 보편적 인간형은 ‘자유와 평등, 개인과 집단, 경쟁과 협력 등 근대 이후 분리, 대립되었던 가치들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사람’이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51%의 이기심과 49%의 이타심’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균형적인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차이는 2% 안팎인데 역사의 변곡점은 그 2%의 변화로 공멸이냐 상생이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해답을 어떤 해외의 역사나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우리 농업사회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찾는 과정에서 농업관련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을 쓰면서 생태계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논은 같은 땅에서 똑같은 작물을 반복해 재배하므로 토양이 황폐화 되어야 하는데 왜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저자는 논이 인공습지로서 상생하는 복합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전통사회에서 논은 지속가능한 농업의 표본이었고 논농사는 상생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학습의 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 중 지역가치 공동체로서 ‘향약’은 상생의 가치를 생활문화로 정착시켰으며 그 토대가 다름 아닌 논농사였다. 국사책으로 잠시 기억을 돌이켜 보면 ‘환난상휼’의 가치는 공동체 성원들이 어려움을 나누는 원칙이다. 지금 내가 쌀이 떨어졌는데 우리집에서 연기가 안나니 이웃이 알아서 한바가지 퍼다 주는 형국이다. 그러나 논의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상생의 가치도 사라졌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상생이 아닌 정복으로 바뀌자 지속가능한 삶의 조건도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래전부터 인간의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공생인이라는 의미의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날 것을 호소해온 통섭학자 최재천을 떠올렸다. ‘호모 심비우스’ 정신은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것이다. 저자는 논의 생태계, 즉 상생의 원리가 사회문제 해결의 일반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혼자만 다 가지는 게 아니고 자본도 권력도 나누자는 것이다. 손해를 보자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서 성공과 결실이 더 커지는 자연의 원리를 믿어보자는 것이다. 과학은 물론 경제도 사회도 생태계로 이어지고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자는 말미에 역시 이 모든 흐름의 장애요소로 단연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지적했다. 나누자고 하는데 극도로 싫어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자기처럼 가지게 될까 두려워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진 사람은 가진 게 많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은 욕심의 동물이므로 자기 가진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 가졌다 생각하면 더 이상 모험이 힘든 것이다. 가진 게 없어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행히 나는 가진 게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자본주의, 그 이후는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두 쪽 모두에게 모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떤 쪽이 더 즐겁게 모험에 뛰어 들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결론이 내게 아주 기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사람과 제도와 권력의 본질을 꿰꿇은 저자의 의미심장한 몇마디를 옮겨 본다. 어느 한 명의 왕을 없애고 새로운 왕이 되기 보다는 모두가 왕이 되면 자연 한명의 왕이 사라진다는 논리는 퍽이나 마음에 든다. 모두 왕이 되려 하지 말고 평민이 되어 평등하게 살자는 불가능하고 위선적인 주장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누어 달라는 것도 실은 나도 한번쯤 왕이 되고 싶었던 속내에 대한 보상일지 모르니까. 다 같이 왕이 되어서 혹시나 또 거기서 쟁탈이 일어날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겠다. 일단 모두가 왕좌에 오른 다음에 둘러보아도 될 일이다. 아니 내가 왕이라면 새삼 둘러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들 왕인데 누가 나보다 더하고 누가 나보다 덜하랴.
자본주의를 마감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역사의 무대에서 최종적으로 퇴장시키는 것은 자본가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대중의 꿈이다.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과거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던 자본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순간 자본주의는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될 때 왕이 사라지는 것처럼 -p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