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월든 호수를 한국에서 보고 싶다.>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을 읽으면서, 나는 월든 호수를 보고 싶었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호수. 그 기슭에 하얀 모래가 있다고 소로우가 말한 그 하얀 모래. 여름철 호수 중심부로 보트의 노를 저어서 그곳에 잠시 동안 머물러 호수 속을 살펴보면 퍼치와 피라미떼가 헤엄치는 모습. 잔잔한 호수에 고기 한 마리가 뛰거나 벌레 한 마리가 떨어지기만 해도 아름다운 동그란 파문으로 일으켜 사방으로 번지는 모습. 그가 자주 말했던 통나무집 뒤편 너도밤나무 그리고 볼에 한 움큼 머금은 채 돌아오는 다람쥐. 겨울철 호수의 물은 얼면서 녹색에서 청색으로 변하는 모습. 그 얼음 층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낚시하는 낚시꾼. 소로우가 말했던 한 해 동안 변하는 월든 호수를 나는 눈으로 보고 싶었다.
<월든>으로 소로우가 기록한 삶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카프카는 책이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트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의 말처럼 <월든>은 나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 거 마냥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난 날 나를 돌아보았다.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시기는 1845년으로 그의 나이 28세이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올해 28세이다. 나이로만 보면 그와 나는 같은 시간동안 세상 속에서 살았지만, 자연에 관한 경험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나에게 콩이 필요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형 마트로 간다. 깔끔하게 손질되고 포장된 물건을 구매한다. 하지만 소로우는 다르다. 그는 밭에다 직접 씨를 뿌리고, 김매기,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면서 콩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 곳에 그는 자연 속에 ‘나’를 느꼈다. 그리고 겨울철 먹거리가 부족한 다람쥐에게 소로우가 옥수수 몇 알을 주자, 예전에 소로우를 두렵게 여기던 다람쥐는 이제 그를 친구로 여기며 장난을 쳤다. 그는 자연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나는 1년 전에 구매한 옷이 올해 유행과 맞지 않다며 서랍장 깊숙이 감춰두었다. 반면 소로우는 옷의 본성이 없어질 때까지 입었다. 그는 옷을 허물이 아닌 본성으로 바라보았다. 즉, 사물을 바라볼 때, 그는 사물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가 유행을 따라 옷을 구매하거나 집을 꾸미는 것은 그 사물의 본성을 꾸미는 것이 아닌, 단지 허물을 꾸며주고 있다는 것이다. 옷과 집의 본질은 사람의 몸을 감싸고, 체온 유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tv 속 아마존을 보게 되면, 나는 으레 그곳에 있는 광물과 나무, 동물들의 경제적 가치로 얼마인지를 계산했다. 그런 나에게 소로우는 자연을 돈으로 여기지 말고, 그들을 우리의 가족으로 여기라 했다. 겨울 철새가 북쪽으로 이동하려고 잠시 월든 호수에서 휴식을 취할 때, 그들을 보면서 사냥해서 얼마나 돈을 벌수 있나 라는 시선보다 같이 살아가는 가족으로 여겼다. 마치 어머니가 내일 훈련소 가는 남동생에게 불고기를 한 점을 밥 위에 올리는 심정으로. 철새들이 호수에서 쉬고, 벌레를 잡아먹으며 체력을 회복하고, 리더 새의 울음 소리에 맞춰 최종 행선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런 심정으로 지켜보라고 말이다.
500쪽이나 되는 분량인 <월든>을 쓰면서, 소로우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우리가 정복할 대상이 아니며, 우리가 살 수 있게끔 품어준 어머니이다. 남들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욕망을 충족시키려 애쓰지 말라. 그 욕망이 허물에 관한 것인지, 아님 본성에 관한 것인지를 심사숙고해라.’이다. 소로우는 마을 변두리에 월세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여기에서 살기보다 월든 호수로 와서 직접 집을 지으세요’라며 권유했다. 매달 월세 값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밤까지 일하면서 남들처럼 살려는 욕심에 맞추려고, 자신의 몸이 축 날도록 일을 하지 말고 욕심을 덜어서 살라고 말이다. 즉, 그는 그 이웃에게 한 가지(남들처럼 살기, 욕망에 충실하기)방식만이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들과 다른 길을 바라보고 걸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고 소로우가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살았던 시기는 1845년에서 1847년. 그 이후에도 소로우는 월든 호수로 자주 찾아왔다. 그 당시에도 자연을 황폐하게 다루는 모습들을 그는 보여주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기찻길, 내년 여름에 쓸 얼음을 채빙하는 노동자, 욕구 최대 만족을 추구하면서 열매를 줍는 마을 사람들. 인간은 최대 만족감(욕심)에 도달하려고, 자연 속 구성원의 몫을 점점 없애갔다. 그런데 21세기,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때보다 더 자연을 세분화 시키고, 수치화로 시켜서, 그에 따른 경제적 영향을 평가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보존보다 어떡하면 돈으로 환산 가능한 자연의 규모를 추정하고, 그에 따른 경제 성장 가능성을 예측하느라 바쁘지 않는가. 우리는 자연을 만물의 어머니로 여기는 것이 아닌,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써 여기지 않았는가.
<월든> 맺는말 편 마지막 구절에 소로우는 이렇게 섰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믿고, 옳다고 여긴 자연을 바라본 시각이 나중에 잘못이었다고 우리가 깨닫는 순간. 그가 언급한 ‘동이 틀 날’이겠지만 이미 회복할 시점을 놓쳐 어느 누구도 살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곳으로 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소로우처럼 자연을 바라보아야 한다. 욕구충족 수단이 아닌, 만물의 어머니로써 자연을 바라보아야 한다.
19세기 월든 호수를 보여준 소로우에게, 나는 보여주고 싶다. 21세기 한국에서 당신의 생각을 간직하고, 행동한 사람들이 당신이 자랑했던 월든 호수만큼 뛰어난 제2의 월든 호수를 만들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