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으로 기억되는 곽재구 시인..“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해“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로 끝나는 시. 사평역의 사평이 화순과 광주와 나주 사이의 어느 곳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사평역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사평의 그 사평을 따라 사평역(沙平驛)이라 쓸 수 있는 것이다.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등 시집으로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이번에 선물처럼 온 책은‘길귀신의 노래’라는 산문집이다. 산문집으로서는 처음 작품이 아닌 이 책의 제목에 쓰인 길귀신이란 시의 신(神)임을 저자는 밝힌다.
‘사평역에서’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사평역에서‘를 제목으로 한 시집을 첫 시집으로 상재(上梓)한 시인에게 사평역은 귀한 인연(因緣)의 장소이지만 그에게 더 근본적인 곳은 와온 바다이다. 저자는 ’길귀신의 노래‘의 글들이 지난 수십년간 와온 바다 언저리에 머물며 쓴 글들이라 말한다. 와온은 순천만에 자리한 작은 바닷가 마을의 이름이다. 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 와온(臥溫)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만월의 시각이라 말하는 시인의 제명(題名)에 걸맞게 책에는 여러 여행지를 순례하듯 거닌 시인의 행적이 그려져 있다. 귀한 여행이 시편(詩篇)들을 구성하는 열매로 맺힌 것이다. 와온의 순천은 순천만을, 순천만 갈대를 연상(누군가는 김승옥의 무진霧津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하게 하한다. 하지만 현재 그곳 갈대는 외래종인 미국미역취에 밀려 봄이면 그 이국의 산물을 베어내는 순천시 인력에 의존하고 있다.
곽재구 시인은 서정 시인이다. 서정 시인이 역사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대학 3학년 생으로 광주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80년 5. 18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2011년 9. 11 사태를 충격적이고 근본적인 함의를 지닌 사건으로 해석하는 시인에게서 인간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애정과 관심이 보임은 당연한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길귀신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는 시인의 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밝히고 그 내력을 아뢰는 안내서로 읽힌다. 시 해설을 쉽고 편하되 내실 있게 하는 정끝별멸 시인이 생각난다. 정끝별 시인은 ’사평역에서’를 해설하며 오지 않다, 쌓이다, 지피다, 던져주다, 적셔주다. 흘러가다 등으로 이어지는 술어(述語)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기다림의 침묵을 그리움의 호명으로 풀어내고 깨어나게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끝별 지음‘여운(旅雲)‘ 188 페이지)
곽재구 시인 같은 분이 생활에서 건져올린 시들에서 정끝별 시인 같은 해설하는 분(문학평론가)이 시인의 삶에 주목해 시를 풀어내는 것은 작곡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생각하게도 한다. 와온 가는 길이나 바닷가 마을이란 시 역시 그렇게 읽힌다.“바닷가 마을로 돌아가는 샛길/ 낮달이 꽃밭을 바라보고 있네.”그러나 비장하게 또는 낙원을 꿈꾸는 간절함으로 다가오는 것은“누군들 생의 와온을 꿈꾸지 않으랴 나는 오늘도 순천만 와온 바다 곁의 바닷가 마을들을 찾아간다.“ 같은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만 생각했다고 말한다. 눈 뜨면서 생각하고 눈을 감아도 시 생각하고 길을 걸으면서 시를 썼다 하니 시인 말대로 시가 시인에게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묵묵히 길을 걷는 사람에게 시가 오듯 에너지가 운명처럼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시인은 이 단계에서 신과의 조우가 가능하다고 귀띔한다.
시인은 지금도 먼 포구 마을의 불빛들처럼 가슴 안으로 안겨오는 그런 그리운 시들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살다 보면 내 인생은 쫑났다고 중얼거리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때 쫑포를 찾아가자. 여수 밤바다... 당신의 인생은 결코 쫑나지 않았다. 쫑포는 삶의 은유이며 역설“이라고 말한다. 자유자재하는 언어의 마술사임을 느끼게 하는 화법이 왜 아니겠는가. 그리움은 기억의 좌표가 빚어내는 마음의 진동이며 한번도 들어선 적이 없는 시간의 골목길에서 그리운 느낌들이 슬슬 풍겨나올 때 나는 이를 인연으로 여기며 전생과 후생을 아울러 이 시간과 나는 알 수 없는 인연의 비단실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시인! 아무나 펼칠 수 없는 언어의 향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고통의 냄새가 나지 않아 하이든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도 말했듯 하이든의 안온한 음악에는 아름다운 곡들을 쓰기 위해 치른 작곡가의 큰 고통이 담겨 있다.
시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여수 밤바다라는 제목의 글에서이다. 영등포에서 여수 가는 무궁화호 밤열차! 어쩔 수 없이 한강(韓江)의 ’여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시인은 언제부터인가 길귀신에게 인사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이 합장하고 머리 숙여 인사할 때 하는 나마스떼라는 말은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드린다는 지극히 겸손한 말이라고 한다. 시인의 해명을 들으며 나는 바로 이 나마스떼라는 말을 떠올렸다. 과연 시인은 길 위에 서지 않으면 밥을 얻을 수도, 사랑을 만날 수도, 새로 핀 꽃향기를 맡을 수도, 새 도시로 여행을 할 수도, 꿈을 꿀 수도, 시를 쓸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길귀신의 노래‘에는 바다와 포구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별히 서정을 북돋는 것은 교사(校舍)에서 서른 걸음만 걸어나가면 곧장 바다인 소라초등학교 여자(汝自)분교의 경우이다. 시인은 두 그루 나무 아래에 자리한 그곳의 책 읽는 소녀상을 보며 어느 해 여름일지 모르지만 그 그늘 아래 찾아와 몇 권의 책을 읽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무리 메마른 사람이라도 그런 곳에서 시를 읽지 않을 수 없으니 당연히 어떤 종류의 책인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지 싶다. 여자도는 전남 여천군 화정면의 섬이다. 인근 무인도까지를 합친 섬의 모습이 너 여(汝) 자 모양을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외딴섬이라는 뜻에서 스스로 자(自) 자를 붙여 여자도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시인은 누군가에게 누허(樓虛)라는 별호를 하나 지어주기도 했다. 허무로써 다락을 쌓는다는 뜻이니 인간이 깊은 허무의 바다를 헤쳐 나와 비로소 인간의 대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꿈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여행이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어떤 필연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꽃씨들이 그 습기 한 가운데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시인은 말한다. 스무살의 길 위에 선 자신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악습들이 없다는 이유로 바람과 햇살과 꽃향기를 좋아했다고. 시인은 또 말한다. 스무살 적 별을 보며 산길을 넘을 때 울지 않았던 것은 너무 깊은 절망 때문에 숨쉬기가 쉽지 않아서였는데 끝내 울지 않았던 것은 더 살아야 시의 본질과 시의 나라의 국경에 이를 수 있다는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고. 물론 눈물을 흘렸지만 밖으로 쏟지 않았을 뿐이라고..
시인은 사평역에서를 쓸 무렵인 스무살 때를 회상한다. 그 무렵 시인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시간들을 기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시인은 신춘문예에 한번에 당선되지 못했다. 시인이 당선된 것은 1981년으로 그 전해(1981년 이전) 써 응모(했으나 낙선)한 시들을 새로 풀어 다시 응모하기로 했는데 그 중 한편이 ’사평역에서‘였다고 한다. 설명인 즉 전해에 쓴 시들이 세련된 나전칠기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새로 풀어 쓴 시는 허드레나무로 엮은 사과 궤짝에 비유될만하다는 것이다. 대학 1년 겨울에 쓴, 신춘문예와는 전혀 상관 없지만 왜 다른 응모작들에 끼워 넣었는지 몰랐다는 시가 바로 당선작이 되었고 당선된 해는 유일하게 당선을 기다리지 않은 해였다고 하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지 싶다.
시인은 상상력은 현실속에서 태어나지만 강력한 현실을 만나면 죽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사평역 이력은 나로 하여금 시인의 이력과 또 다른 의미의, 가슴 아프지만 서정과 낭만으로 기억되는 간이역(簡易驛)과 등대(燈臺)라는 두 유물(遺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임석재 지음 2009년 6월 22일 출간 ’한국의 간이역’, 2013년 11월 14일 동아일보 기사‘20 세기 초 한국의 등대는 일제 침탈의 등불이었다’참조) 문제는 수탈 vs 낭만, 서정 등의 구도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침탈 vs 서정, 낭만의 구도가 아니라 교훈은 기억하되 의미와 서정, 낭만 등은 간직하는 유연함이 아닐지? 시인은 이제 누군가 사평역에서를 말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1981년 이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작가가 된 것 같아서라고 한다. 공감이 간다. 구구절걸절한 내력을 가진 시를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 하나만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변명이 듯 한다.(페이스북 이벤트에서 나는 시인을‘사평역에서‘와 ’와온바다‘로 기억된 시인이라 표현했다. 다행이다.
시인의 ’와온바다‘(“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달은 이곳에 와/첫 치마폭을 푼다/ 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 등이 하얀 거북 두마리가 불빛과 불빛 사이로 난 길을/ 리어카를 밀며 느릿느릿 올라간다// 인간은/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 새벽이면/ 아홉마리의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와
나희덕 시인의 ’와온에서‘(“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노을은 내가 훔쳐간다”)를 비교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