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노. 오래전에 방송된 TV 광고 덕분에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게 실재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머릿속에서 ‘노라노’는 어쩌면 앞과 뒤가 같은 발음으로 이루어진 어떤 리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녀는 현재 85세의 한 여성이다. 본명은 ‘노명자’다. 하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그 본명을 부르지 않는다. 노라노(Nora Noh)란 예명은 그녀가 평생을 벗지 않은 옷과도 같다. 그녀는 85세라 믿기에는 너무나 세련되고 멋지다. 외모와 패션감각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항상 ‘최초’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이자 국내에서 최초로 패션쇼를 연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전시회를 열었다.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이란 프랑스 샹송 곡이 전시회의 이름이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고객들에게 옷들을 기증받고 몇몇 옷은 다시 만들며 차분히 전시회를 준비해 나간다.
경쾌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바로 그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두 개의 문>이란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던 여성 단체 ‘연분홍치마’가 이 작품을 만들었다. <노라노>는 ‘여성’과 ‘패션’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한국 사회에 뚜렷한 인장을 남겼던 한 여성의 삶을 되짚고, 그것과 함께 이 사회에서 ‘패션’이란 분야는 어떻게 해서, 누구에 의해서 발전해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이야기는 주로 전시 ‘라비앙로즈’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전시를 위해 옛 추억을 간직한 많은 이들 - 엄앵란, 최은희 같은 당대의 스타들 - 이 카메라 앞에 섰고, 영화는 그들의 인터뷰와 그들이 활동했던 모습들을 넘나들며 나아간다. 그리고 과거의 영상은 물론이고 재현된 장면까지 사용하며 친절한 안내자처럼 관객들을 과거로 이끈다. 여기에 디자이너 노라노의 육성 해설이 곁들여지며 무겁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가 영화 속에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큐멘터리 <노라노>가 영광스런 과거의 향수만을 좇는 것은 아니다. 전시회 준비 과정에서 노라노는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같은 젊은 세대와 전시 준비를 함께하며 갈등을 겪는다. 카메라는 이런 갈등과 그녀의 고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그녀를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끌어당긴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단순하게 노라노의 대단함을 찬양하기보다는 그녀가 지금 세대에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고찰해내고자 한다.
노라(Nora)라는 그녀의 예명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따왔다고 한다. 집을 나가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던 노라처럼 노라노 또한 자유롭고 당당한 여성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런 당당함은 곧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 된다. 그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녀의 옷은 여성으로서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다’고. 남성의 시선이 곧 사회의 규범이 되었던 시대에 노라노는 그렇게 여성 스스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음을 옷으로 표현하였다. 다큐멘터리 <노라노>가 바라보자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현재에 연결하고자 하는 지점도 바로 그 당당함이란 자리일 테다. 영화는 그녀를 박제화 직전에 서있는 ‘살아있는 전설’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성의 자리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때 그 기억들을 다시 불러 모으며 그것을 현재의 자리에 새롭게 재봉하려 시도한다. 여성 모두의 ‘장밋빛 인생’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