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헤르만 헷세
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들 속에서의 내 모습. 뭐라 표현하기도 어렵고, 굳이 들춰볼 필요도 느끼지 못하여 덮어두었던 그 시간들. 만일 내가 나 스스로의 이야기를 싱클레어처럼 풀어낸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싱클레어는 막스 데미안, 프란츠 크로머,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 같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간다. 싱클레어의 명제에 그들 한사람 한사람은 큰 영향을 미친다.
독자들은 그 과정을 읽어 나가면 내 삶에 데미안 같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 삶에 베아트리체나에바부인 같은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반대로 우리 삶에는 프란츠 크로머와 같이 나를 괴롭혔던 존재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과연 나는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사족으로는 특히 데미안을 만나는 장면들에 너무나 많은 우연이 있어 그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 있고, 또한 에바부인을 묘사하는 부분은 무슨 판타지 같다는 느낌도 좀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벼랑위의 포뇨”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포뇨의 엄마같은 느낌이랄까. 왠지 등뒤에 형광등 100개쯤 비취면서 환하게 등장하고 말할 때는 에코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인상적 구절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 시절로부터 짙은 향기가 밀려와, 속에서부터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마음을 뒤흔든다.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아, 지금은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거슬리는 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내디뎠던 걸음들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아직 내 소년 시절에 머무르는 동안, 더 할 이야기는 오직, 어떤 새로운 것이 나에게로 닥쳤는지, 무엇이 나를 앞으로 몰아갔는지, 나를 찢어내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것 뿐이다.
이런 충격들은 늘 <다른 세계>로부터 왔고 늘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하였다. 그것들은 늘 혁명적이었다. 내가 그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세계>, <다른 세계>가 다시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내 자신 속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건 좋지 않아.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히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편안히 안착했다.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거기로 인도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서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이 음악 안에 보물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얻듯 이 보물을 얻어내려고 구하고, 가슴뛰고, 애쓰고 있다고. 나는, 테크닉 면에서는, 음악을 별로 많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바로 이런 영혼의 표현은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이해했으며 내 속에서 음악적인 것을 자명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게, 구름을 바라보게.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묻질랑 발도록.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님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든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친한 길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이지요”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