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그의 작품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거대한 생각의 집합체다. 그의 영감과 탐구는 노트의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백과사전'으로 거듭났고 소설 속 주인공인 다비드 웰즈의 할아버지이자 개미 박사인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란 이름으로 소개된다. ‘상상력 사전’만큼이나 소설 자체가 추구하는 문학, 신화,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과학 등을 위시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두루 섭렵되어 전해진다. 단편적인 문장만 들여다보면, 허무맹랑한 SF임엔 틀림없지만, 디테일한 설명과 함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부연 설명을 듣게 된다면 결국 독자들은 설득 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파워풀한 지적 시험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성경에 쓰인 [요한 묵시록]이 장차 인류 문명에 닥칠 미래를 묘사한 것이 아닌, 과거 거인들의 문명에 닥쳤던 부분이며 숨겨진 과거를 들추고 있는 것이라는 부분이 놀랍다. 가히 순도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베르베르만의 독자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백과사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미심쩍고 불확실한 사안들을 결합하고 때론 분리하고 완급을 조절하여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니, 베르베르의 지적 상상력이 『제3인류』를 빚어냈다. 이 작품은 베르베르만의 특유의 상상력이 농축된 장대한 스케일의 SF 과학소설이다.
『제3인류』가 시작되는 시점은 이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오늘, 절대적인 시간이 아닌,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 무분별한 핵실험, 야만적 자본주의, 종교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적 책략, 자연재해와 환경 재앙, 자원 고갈, 대전염병 등으로 인해 찾아온 지구 최대의 위기 속에서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한 비밀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지구 탄생에서부터 현 인류, 그리고 앞으로 탄생할 제3인류의 창조까지를 조명한다.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첫 번째 인류가 아닌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인류는, 키가 17미터에 달하는, 무엇이든 우리의 열 배에 해당하는 신체구조를 지닌 거인족들이며 그들은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현재의 인류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남극에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면은, 이를 증명하는 현장이다. 저명한 고생물학자 샤를 웰즈([개미]의 주인공인 에드몽 웰즈의 아들이자 다비드 웰즈의 부친)의 탐사대가 남극의 만년빙 아래에서 8천 년 전에 멸망한 거인족(호모 기간티스)의 문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중대한 발견과 함께 곧바로 빙하 속으로 묻히고 만다.
작가는 지구를 광물의 구체가 아닌 사고 능력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등장시킨다. 오직 독백의 형태로만 등장하는 가이아(지구)는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전체 소설에서 1인칭 서술로 배치되었다. 지구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44억 년 전 테이아(달)와의 충돌, 지각 변동, 공룡들의 시대 등을 회상하며, 석유와 숲이 곧 자신의 피와 모피이니 함부로 퍼내거나 파괴하지 말라고, 지구를 존중하면 지구 역시 인간을 존중하겠다고, 가이아는 독백한다. 가장 중요한 진화의 길은, 인류가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며, 인간들이 이기심에 사로잡힌 유해한 기생동물의 처지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파트너의 지위로 넘어가는 길이라고. 그리고 일곱 가지 진화 프로젝트에서, 자신에게 위험이 되지 않는 고대 아마존들의 마지막 후예인 여성들에게서 찾은 오로르 카메러의 ‘여성화’와 아프리카 콩고의 피그미족을 모델로 삼은 다비드 웰즈의 ‘소형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게 하여,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생물학적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신의 영역에 다가가려는 과학자들의 신(新) 인류를 향한 열정과 생명 공학의 힘에 도약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것은 지구(가이아)의 독백과, 프랑스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의견이 일치한다.
그리하여, 핵무기나 방사능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크기로는 초소형, 성적으로는 여성이 대다수인 [에마슈 : 초소형 인간을 가리키는 Micro-Humains의 두문자 M(엠), H(아슈)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작명]가 탄생한다. 미성숙한 존재인 인간이 졸지에 창조주가 되어 현 인류보다 열 배가 작은 17센티의 에마슈를 탄생시키고 보육하지만 불완전한 신의 위치에 놓인 그들은 갈등과 번민을 거듭한다. 에마슈들의 타락과 범죄, 종교와 제도, 자유의지의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 역시 현 인류의 문명과 다를 바 없는 물리적 시뮬레이션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다비드의 전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가 문명을 지배했던 호모 기간티스였고, 170센티의 현 인류를 탄생시킨 창조자였던 자신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인류 문명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는 것일까, 이 또한 하등의 의미가 없는 소모전이었을까. 인류가 지금처럼 지구 행성을 소모하는 자기 파괴적 생활 방식을 계속한다면 지구는 그야말로 종말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제3인류’를 통하여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툭 던진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