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외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면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에는 달콤한 낭만이 있으며 그래서 내가 더 고결한 거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 고독에는 목적이 있다고, 아, 틀림없이 그렇다고.’ 357쪽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사는 경우는 두 가지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을 경우 삶의 만족도는 낮지 않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차적으로 고립된 경우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경우 언제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관계는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런 사례는 많지 않다. 한 번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리즈 무어의 『무게』는 소위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두 명의 이야기다.
소설은 아서와 켈의 이야기를 교차로 진행된다. 먼저 아서가 켈의 엄마 샬린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한때 아서가 교수였던 시절 야간 학생이었던 샬린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자신의 지난 삶과 현재의 모습을 담았다. 아서는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에서 250kg의 몸무게로 혼자 살아가는 쉰여덟의 남자다. 그의 삶에서 외출이란 단어는 사라졌고 온라인 쇼핑과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게 일상의 전부다. 그런 그에게 샬린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유일한 의미였고 즐거움이었다. 교수였던 아서는 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을까. 샬린과 아서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이 두 가지 궁금증이 이 소설을 이끄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샬린의 이야기는 아들 켈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열아홉의 켈은 공부보다는 야구를 잘 하는 소년이다. 아빠는 켈이 네 살 때 떠났고 엄마는 항상 술에 취해 산다. 엄마는 켈의 야구를 응원하지만 대학에 가기를 바란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아들이 이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샬린에게 삶이란 타인의 시선에 의한 모습이었다. 켈을 지역 고등학교가 아닌 부자 동네에 입학시킨 이유도 그랬다. 샬린에게 가장 빛나던 때는 야간으로 대학 수업을 받으며 아서와 사귄 짧은 시절이었다. 켈은 자살을 시도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연락이 닿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야구만이 켈의 전부였다.
아서는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도착한 편지와 전화로 자신의 아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샬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누군가 자신의 집에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렵지만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아서는 집을 청소하기 위해 업체에서 연락하고 욜란다의 방문을 받는다. 욜란다는 250kg의 거구를 지닌 초로의 남자인 아서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어린 욜란다가 부담스러웠지만 아서는 그녀를 돕고 싶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임신을 한 욜란다를 집에 머물게 하고 함께 산책을 한다. 아서에게는 모든 게 낯설었다. 유명한 건축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처음으로 느껴 본 따뜻한 감정이었다.
샬린은 켈에게 편지를 남긴 채 자살에 성공한다. 켈은 엄마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더구나 아서가 아버지라는 엄마의 편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 살 때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찾았지만 엄마의 말은 사실이었고 아서 역시 아버지가 아니었다. 켈은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 친구 린지와 그녀의 부모님이 있었다. 아서에게 욜란다가 있듯 말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우울하다. 『무게(Heft)』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인물의 감정을 묘사로 설명한다. 먼지와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집에 혼자 살고 있는 아서, 낡고 좁은 집에 술가 약에 취한 샬린, 둘 사이를 이어주는 전화기와 편지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 보여준다. 전화기와 편지는 소통의 동의어이다. 아서와 샬린은 세상과 단절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두려웠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욜란다와 켈이 새로운 문을 열어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욜란다와 켈에게 아서가 그러하듯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 하겠다. 고립형 삶이 증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초반의 궁금증이 끝까지 힘을 내지는 못 했다. 아서와 샬린의 이야기는 지루했고 그들의 상처가 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열린 결말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의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