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전투기 조종사로 12년간 근무하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 제대한 남자. 혹 하루키와 흡사한 전업작가로 전환한 사례다. 예상보단 고요한 문체가 무덤덤 읽혔다. 몇몇 단편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스토리도 나름 괜찮았고. 반면 불륜, 사랑, 욕망에 대한 그렇고 그런 소설들이 주를 이뤘다. 딱히 차별화할 수 있는 것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 몇 편 없는 것이 아쉬웠다.
10편의 단편소설. 출퇴근길에 읽으면 필시 글맛이 떨어질 것 같다. 새벽 1시쯤, 자기 전 보드카 한잔 마시며 읽기 좋은 소설이다. 보드카 한잔 마시다 필받아 집나갈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단편소설의 주인공처럼 이성을 만나 어떤 얘기든 나누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소설이다. 소설 분위기에 휩싸여 의도치 않는, 상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강요하는, 따라해보고 싶은 이야기들. 불륜이나 그밖에 야릇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분위기에 매료된다는 것 뿐. 남자든 여자든 조용한 바에서 서로 바라보며 이성이나 동성 친구들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보는 것, 한번쯤 해보고 싶지 않을까? 정말 친하다 해도 섣부르게 말할 수 없는 것들, 성적인 이야기나 이성의 매력, 미래나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 야릇한 충동적인 경험들까지. 꼭 행동으로 뭔가 저질러야 일탈이라 말하진 않는다. 말로서, 몸짓으로서, 아님 상대방의 뻔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일탈을 경험할 수 있다. 일탈이 부정적인 의미로서만 쓰이진 않는다. 이제껏 '일탈'이란 단어를 그렇고 그런 뜻으로만 쓴 기성세대들의 바보같은 단순함에 우리가 길들여저 있을 뿐.
우린 항상 상대방의 시선을 쫓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인물로 판단할지를 걱정하고, 그런 나머지 말할 수 있는 영역의 울타리를 조율한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물론 공적, 사적인 특수한 영역에선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친척들과의 만남 등)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 다시 볼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간관계의 그물에서 건져지는 물고기는 극히 일부다. 그 일부에서도 곧 죽어버리는 물고기가 대다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어차피 다시 볼 물고기들은 100마리 중 1~2마리뿐. 감정에 그저 솔직하면 된다.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고 눈치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당신을 기억하거나 영원토록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확률은 '0'% 가깝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판단은 자신이 하는거지 상대방이 아니라는 얘기다.
힌트만 주지 말고 정답을 얘기하시길...
전체적인 이야기가 거의 비슷하지만, 그 중 <어젯밤>과 <플라자 호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편 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작가가 친구에게, 파티에서 얼핏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허구로 만든 이야기는 역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그렇다고 내가 읽으면서 '이건 실제 이야기였군, 이건 100% 소설이군.' 이렇게 맞추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건 아마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다는 얘기다. 인생은 뚜껑을 열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살아볼만한 요소일지도...
이 책은 비슷한 단편들이 주로 몰려 있어 신선하거나 전체 다 만족하진 않을 것이다. 읽다보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단편들 때문이라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재미가 아닌 분위기로 읽어보시길....그리고 새벽에 바에서 소설같은 대화를 주고 받고 싶은 상대를 생각해보라..만약 있다면 찔러봐도 좋다...대부분 낚일 것이다...
인생은 허무하지만, 어차피 소설과 다를 게 없다...
후회따위는 무덤에 들어간 뒤 해도 전혀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