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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사진의 역사

글쓴이: 처음처럼님의 블로그 |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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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결혼기념일을 깜박 잊어버리는 바람에 아내에게 면목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침부터 회의가 꼬리를 무는 바람에 챙길 정신이 없었다는 변명을 너그럽게 받아주어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것이 남습니다. 아이들도 잊고 있었는지 들어오지 않아, 둘이서만 작은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을 때, ‘지금까지 살아줘서 고맙소!’라고 감사표시를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혼 3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감동을 주는 이벤트를 미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신혼여행 사진 이야기 때문입니다. 제주도로 다녀온 신혼여행에서 들고 간 두 개의 카메라로 36커트 필름 열통을 모두 찍었습니다. 저도 찍었습니다만 여행을 안내하신 택시기사님도 찍어주셨는데, 좋은 사진은 생각보다 많이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필름을 많이 가지고 간 것은 많이 찍다보면 좋은 사진이 많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역시 사진은 찍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매형의 카메라를 빌어서 흑백사진을 찍으면서 사진하고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울 여건은 되지 않아 남이 찍은 사진을 눈동냥하거나, 여기저기에서 주어들은 요령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사진은 저의 삶의 기록 정도의 의미일 것 같습니다. 처음 카메라를 장만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을 받을 무렵입니다. 사무실을 찾아온 카메라 세일즈맨으로부터 눈대중으로 거리만 맞추면 되는 반자동 삼성미놀타 카메라였고,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제대로 된 미놀타 카메라를 샀던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를 거쳐서 스마트폰에 장착된 카메라기능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어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가를 뒤쫓고 있는 현대사진연구소 진동선소장님의 <사진예술의 풍경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동선소장님은 ‘사진이 갖는 완벽한 시간의 알리바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진작가이며, 사진평론가 겸 전시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저술을 통하여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원리를 깨치면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정직한 눈과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면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값비싼 카메라나 멋진 촬영지,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힌 도식적인 촬영 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사진의 본질이 올바른 눈과 마음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한 마디는 쉬운 것 같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From today, painting is dead).”라고 통탄했다고 하는데, 프랑스사람이 영어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속성(永續性)이 없는 사물을 화폭에 담아 남기는 유일한 시각예술로 대우를 받던 회화에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미술가들은 사진을 예술로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이 발전해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결국 미술이라고 하는 불멸의 시각예술의 얼굴을 없앤 주인공은 사진이고, 미술을 하나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게 한 것도 사진이고, 미술을 옛 모습으로 자리할 수 없게 만든 것도 사진이다. 예술이 끝없이 그 모습을 바꾸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사진인 셈이다.(7쪽)”라고 정리한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사진예술의 풍경들>은 시각예술의 한 분야로서 사진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리뷰를 인용하면, “174년의 역사 속에서 사진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 기술의 진보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사진이 어떤 대상을 향하느냐, 어떤 미학으로 담느냐,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진예술 또한 얼굴을 달리해왔다. 그 역사의 중심에는 사진을 통해서 예술적 미감을 발휘했던 뛰어난 사진가들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있다. <사진예술의 풍경들>은 그러한 전설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사진예술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여정이다.”라고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170여년의 역사를 한권으로 축약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사진예술의 변화를 한눈으로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저자는 174년에 걸친 사진의 역사를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시대는 <예술로서의 사진, 그 시작>으로, 새로 발명된 사진이 어떻게 예술과 접목을 시도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1860년대까지도 기술적 완성도가 미숙한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오랜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피사체가 움직이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없어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진가들은 사진이 예술이 되기를 열망했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피사체를 복제하듯 찍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고민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최봉림의 <세계 사진사 32장면>에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인물사진가 펠릭스 나다르의 말을 인용한 저자는 당시 사진가들은 모델에 대한 ‘정신적 인지’, 사진의 ‘심리적 측면’, 그리고 ‘내면의 닮음’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찾으려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사진만의 미학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던 초기라서 아무래도 앞서 있던 시각예술인 회화에서 구하는 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예술로서의 사진의 역할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이어서 사진 자체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언뜻 헷갈릴 것 같은 개념인 ‘예술로서의 사진’과 ‘사진으로서의 예술’의 차이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예술로서의 사진’은 사진의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반면에 ‘사진으로서의 예술’은 사진의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로서의 사진’은 조작, 합성, 변형이 가능한 탈시간적인 사진표현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으로 미술의 요건을 갖추고 찍은 미술적 경향의 사진을 말하며, ‘사진으로서의 예술’은 사진의 시간성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사진, 즉 시간에 예속적이라 할 만큼 시간성에 충실한 사진을 말한다. ‘예술사진’과 ‘사진예술’의 개념적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45쪽)” 두 번째 시대를 설명하는 <사진으로서의 예술을 향해>에서 저자는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로부터 시작된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미래파와 기계미학, 특수기법, 즉물사진, 추상 표현, 찰나의 미학, 누드의 미학, 1차 대전 이후의 사진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누드의 미학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진이 발명된 직후인 1845년부터 1995년까지 약 50년 동안 파리에서 제작된 사진들을 살펴보면 사진관에서 제작된 초상사진 못지않게 지하에서 음성적으로 제작되어 유통된 누드와 포르노 사진들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도색물 시장을 맡고 있던 그림의 자리를 정밀성과 선명함을 무기로 하는 사진이 차지하게 된 때문일 것입니다. 누드 사진이 예술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초현실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체를 왜곡한 이미지를 초현실주의 누드사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리얼리티를 왜곡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관점에서 누드를 찍은 사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고 합니다.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사진적으로 완벽한 누드예술사진은 에드워드 웨스턴에 의하여 1930년대 중반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웨스턴의 1936년작 <누드>는 사진의 역사에서 최고의 누드사진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웨스턴의) 누드사진의 특징은 정갈한 인체 형상과 절제된 감정이다. 상상으로 구현해낸 그림 같은 형상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몸과 같은, 살아있는 듯 생생한 여성의 누드를 보여준다.(242쪽)”는 저자의 설명이 없더라도 모델의 벗은 몸에서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누드예술사진이 늦게 등장하게 된 것은, 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진이 가지는 사실성, 정확성, 선명성이라는 특징에 대하여 화가들은 창의성의 산물이 아니라 기계적 요소로 보고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에 사진가들은 오히려 이러한 특징을 지우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시대는 현대사진이 출발하는 195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휴대가 간편한 라이카카메라가 나와 ‘순간포착’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사진예술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했습니다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1952년 출간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서 사진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결정적 순간’과 ‘절묘한 포착’이라는 두 가지 사진적 요소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은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 여기에 구성 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렵되는 결정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묘한 포착’이라 함은 “완벽에 가까운 조형 감각, 예리한 세부 관찰, 순간의 우연성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절묘하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276쪽). 저자가 <새로운 표현, 새로운 미학>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것처럼 이 시대에는 사진작가의 시각과 표현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웨이브 스테이지, 혹은 메이킹 포토의 방법론이 등장하면서 조각하고, 칠하고 만들고 연기해도 사진이라 할 수 있는지 하는 고민이 들 정도로 모호해진 사진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을 겪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지막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에서는 198년대 후반부터의 현대사진의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주목받았던 연출사진, 구성사진, 설치사진, 무대사진, 조작사진 등 메이킹 포토에 쏟아지던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다시 사진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새로운 개념을 찾게 된 것입니다. 역시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무표정의 미학, 정신 심리학적 이미지, 패션사진, 21세기 기계미학, 신표현주의 등입니다. 심지어는 몸을 통한 자연적인 치유를 표현하는 힐링으로서의 사진예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르노 라파엘 미키넨과 마이클 케나의 사진이 주목을 받는 이유에 대하여 저자는 “손맛이 묻어나는 흑백 톤이 일품인데, 여기에 정갈한 프레임, 마음을 정화시키는 흑백 농담, 깊은 철학적 사색까지도 깃들어 있다.(426쪽)”고 했습니다. 한편 마이클 케나는 “아마도 위대한 침묵 같은 것, 그러니까 내 사진을 통해 잠시 바깥의 소란스런 소리를 잊고자 한 게 아닐까요?”라고 했답니다.


 


저의 추억과 관련된 부분을 짚어보면, 발명 초기 사진은 두 가지 커다란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오랜 노출시간으로 인하여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과 인간의 눈으로 보는 컬러세상을 오직 흑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1870년대 후반 들어 노출시간을 줄이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진은 시간의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컬러로 표현하는 기술을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컬러사진이 나오기 전까지 사진관에서는 컬러사진을 요구하는 손님이 있으면, 흑백필름이나 인화지 위에 채색물감으로 칠해주기도 했는데, 1970년을 전후해서 학교 앞에서 파는 물감으로 흑백사진에 컬러를 입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무렵 학교를 다니셨던 분들에게는 추억의 한 장면을 회상하는 기회도 되겠습니다. 사진에서 컬러가 구현된 것은 1895년 영화를 탄생시킨 뤼미에르형제가 1907년 오토크롬기법을 영화에 컬러영화를 구현한 이후, 1908년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오토크롬 사진을 선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사진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174년의 사진의 역사를 시기마다 주목받는 사진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에 있는 저의 관심에 대한 저자의 다음 구절을 답으로 뽑아보았습니다. “사진은 눈으로만 말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 사진은 마음의 눈만으로는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는다. 여전히 부족하다. 손의 눈이 필요하다. 눈-마음-손이 적절히 맞잡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눈은 세상을, 사물을 보는 일을 하고, 마음은 느끼는 일을 하고, 손은 표현하는 일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사진예술의 바탕이 튼튼해진다.(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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