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들었다가 무겁게 내려놓았다. 쉬이 공감하다가 불편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눈물을 펑펑 쏟다가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요. 라는 물음으로 책을 쓰다듬었다. 나는 김소연 시인을 잘 몰랐다. 그녀의 산문집은 알았지만 그녀의 시는 몰랐다. 『시옷의 세계』라는 책 속에 감질나게 들어차 있는 짧디짧은 몇 구절의 단상을 통해 그녀의 시를 맛봤다. 그녀가 좋아하는 글은 밀도가 높은 글이라 했다. 어딘지 모르게 건조한 구석이 있는 글도 좋다고 했다. 책 속의 짧게 남겨진 그녀의 단상, 짧은 시와 같은 구절들은 그녀가 좋아하는 글의 습성을 따른다. 어딘지 모르게 건조하고 어딘지 모르게 단어와 단어의 사이가 꽉꽉 들어차 어쩐지 모르게 갑갑하고 왠지 모르게 내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누구나의 심정과 불일치할 때보다 일치할 때가 더 많을 그런, 밀도가 높은 글이었다. 반면 그녀의 일상은 느슨하다가 촘촘하다가 편하게 다가오다가 무척 불편하다가, 그렇게 종잡을 수 없게 흐르며 다가왔다. 독특했다. 비읍의 세계도 아니고 이응의 세계도 아니고 왜 시옷의 세계일까. 그녀는 왜, 시옷을 통해 이토록 하고 팠던 이야기가 많았을까. 일반인이었다면 떠올리기도 쉽지 않았을 아니, 떠올렸다 해도 그냥 그렇게 흘려버리고 말았을 이야기들이 그녀, 김소연이라는 시인에게서는 하나같이 특별한 글감이 된다. 시인이라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감상은 조금 식상하고 조금 멋없다. 그냥, 그녀, 김.소.연.이라는 사람이니까 이런 글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는 오늘(2013. 09. 19), 어김없이 소원을 빌었다. 내 마음이 팔딱인다는 신호, 마음속 열정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삶을 끌어안으려는 작은 몸짓의 발로. 나는 아직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너무 슬프고 때로는 절망 안에서 허우적댄다. 단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그게 좋다. 살아있음으로 인해 체험할 수 있는 삶의 온갖 애환과 통증의 무게가 그 어떤 환희보다도 달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김소연 시인은 어쭙잖은 해피엔딩과 쉽게 말하는 희망에 환멸을 느낀다 말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니까. 나는 미세하나마 미약한 희망에라도 희망을 걸고 뒤끝이 시원섭섭하더라도 뭐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안도하는, 나약하고 소심한 한 인간이니까. 그래서 나는 쥐꼬리만 한 가능성, 기대할 수 없을 만큼의 가능성을 담보로 한 희망을 희망한다. 그마저도 없는 삶은 너무 걍팍하니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삶은 너무 안쓰러우니까. 김소연 시인 그녀가 보았던 삶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지구촌 각지를 떠돌며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났던 나날, 지나온 세월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친구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서로를 끌어안아야 함을 이해했을 때, 희망버스를 타고 마음속에 희망의 싹을 틔우며 함께 밤을 지새웠던 그들과 공감했을 때, 눈에 보이는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환멸 그 너머의 환희가 분명 그녀 안에는 존재했을 거라 믿어본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내 성격과 비슷하게 닮은 그녀의 글을 읽으며. 더군다나 나와 가까운 지역 태생이라니... 그래서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자신의 성격을 알고 표현에 서투름을 시로 표출한다는 말에 괜한 인간적 애정이 동하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그래서 전하지 못한 말도 참 많았다. 전한 뒤에 괜한 참견이지 않았을까 자책하기도 했고 전하지 못했음에 안타까웠던 적도 부지기수다. 차라리 전하지 않았더라면 했던 적도 많았고 가슴을 치며 꼭 전했어야 했는데, 마음 아파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전히 전한 말과 전하고 싶은 말, 끝내 전하지 못한 말 사이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반대로 그래서 전하지 못하는 말도 많다. 머릿속에서만 맴맴 도는 자음과 모음, 단어와 어절의 행간 사이에서 나는 쉼 없이 방황한다. 때로는 후회를 때로는 자책을 때로는 아쉬움을 때로는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언젠가는 전해지겠지, 와 같은 바람으로 전해지는 말도 있었고 끝끝내 전해지지 않았던 말도 있었다. 알아주었으면 했지만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라고 스스로 갈무리하며 애써 등을 돌린다. 내 뒷모습에서 전하고 싶었던 내 말이 보이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때로는 괜한 오기를 부려보기도 한다. 전하지 않아도 조금은, 알아주면... 안 될까요.. 그대?
어느 장章, 어느 행行을 읽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흘렀다. 신파 일색의 글이 아님에도 나는 그녀의 글이 슬펐다. 아련한 것들, 까무룩 잊힌 것들, 지나간 것들을 향해 뻗어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흡사 사형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툭하면 눈물이 솟구쳤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둑이 터져버려 흘러넘치는 댐의 거센 물보라처럼 다가왔고 그녀의 글이 둑을 순식간에 범람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일이면 죽을 사람 같았다. 가을이라서인가. 나이 들면서 점점, 가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있다. 작년 이맘때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마냥 서럽고 마냥 힘들고 마냥 싫은. 억눌러왔던 감정이 더는 자리가 없다 보채며 나를 닦달하고 발악하며 꺼내달라 아우성일 때가, 꼭 1년 중 이맘때였던 것 같다. 작년에도 잘 지나갔으니 올해도 그러할 것이다. 1년 중 으레 치르는 연중행사처럼, 조금 아파하고 조금 방황하고 조금 지쳐가지만, 종래에는 '가을이니까.', ' 1년의 막바지니까...' 라는 말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만 분분히 흩날릴 것이다. 나니까 알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나를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자신마저도 몰라주는 자신은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사람의 속내가 빤히 보일 때는 내가 좀 움직여보자. 너무 한자리에 앉아 있었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너무 안 보일 땐 그땐 좀 진득하게 앉아 있자. 너무 움직였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속내」전문-24쪽
궁금했다. 김소연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왜? 이기도 한 이유다. 왜 그런 행동, 말을 했으며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의문을 품는. 이런 질문으로 가득 찬 내가, 많은 사람을 피곤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묻기에만 급급했을뿐 되돌려받기를 버거워 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질문, 물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침묵이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해지지 않는 상태. 삶, 사랑에 있어 왜? 가 필요한 이유다. 삶은 왜 이어져야 하고 왜 너와 나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 세상에 종언을 고하듯 암막 커튼을 드리우듯 차단하는 침묵보다 나은 이유다. 『시옷의 세계』는 이런 사소함, 하지만 결단코 사소하지 않고 사소해질 수 없는 내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오늘, 누구를 만났지? 만나서 뭘 했지? 오늘 하루는 잊혀질 과거 안에서 기억될 만큼 뜻깊었니? 라고 묻는다. 내 삶에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삶을 살고있는 것이라 생각하니까. 심보선 시인은 그녀의 글을 또 하나의 세계라 했다. 이병률 시인은 그녀의 문장을 물고기의 비늘 같다고 했다. 그리고 신해욱 시인은 그녀의 이야기는 이 걍팍한 시대를 견디는 영혼의 섭생법이라고 했다. 이 세상의 나와 다른 세상의 나를 이어주는 기이한 안내자(시인)와 함께였기에 좋.았.던. 시간. 그녀의 글을 만나고 돌아오는 곳에서 세상으로 뱉는 나의 말은 그러했다.
가끔, 이 삶이 진짜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가끔, 이 삶이 내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어떤 이의 허상 같은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삶은 내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른 누구일 수도 없을,
오직 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었다.
그래도,
나는 가끔,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 세상에는 무엇이 있니? 그 세상에는 무엇이 너를 살게 하니?
가끔,
그런 것들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