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음반은 의외라는 반응이 많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그냥 해보고 싶었는데요.”
“그래도 무언가 계기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뭐 할 때마다 다 의외라고 했어요. 그룹하다 솔로할 때도 그랬고, 솔로하다 밴드할 때도 사람들은 다 의외래요.”
“그럼 공연 얘기를 해보죠. 이번 공연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요?”
“없어요.”
“특별한 컨셉트는…?”
“없어요.”
“넥스트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을까요?”
“글쎄요, 그건 뚜껑 열어봐야 알겠는데요.”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봤지만 이런 상대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엇’ 황당했고, 시간이 지나자 ‘뭐야’ 다소 기분이 상했으며, 점점 ‘그래, 한번 해보자는 거지’ 오기가 발동했으나… 결국은 졸랐다. “저 기사 써야 하거든요. 말씀 좀 해 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사무실을 나와서는 ‘참 먹고살기 힘들다’라는 생각마저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방송이고 리뷰고 언급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 시대 최고의 이슈 메이커라는 그의 공연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봐주자.
지난 1월 ‘The Songs For The One’이라는 참으로 재지(jazzy)한 스페셜 음반을 발표하고, 내친김에 재즈 컨셉트의 라이브 무대까지 마련한 신해철. 크로스오버 재즈 밴드 ‘세바’와 색소폰, 트롬본 등 관악주자들이 들어찬 무대는 분위기가 사뭇 격조 있다. 그리고 그 품격에 걸맞게 신해철은 연미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재즈 컨셉트의 공연임을 알고 왔는데도, ‘Love’ ‘하숙생’ ‘A Thousand Dreams Of You’ ‘장미’로 이어지는 나긋나긋한 무대가, 아니 그렇게 보드랍게 노래하는 신해철이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마왕이 이래도 된단 말인가?
“뭐 제가 붙인 별명인가요?” 앞선 인터뷰에서 마왕의 앨범치고는 너무 말랑말랑한 게 아니냐는 얘기를 했더니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제가 머슴인가요? 왜 이래라저래라 하세요. 그리고 헌법에 신해철은 이러이러한 음악을 하라고 나와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공연에서는 스스로 버터나 마가린을 녹여 밥에 얹거나, 참기름에 비벼 먹는 얘기를 꺼내며 될 수 있는 대로 더욱 느끼하게 무대를 이어갔다.
신해철은 이어 이번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지친 밤님과 함께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 들어보라며 ‘When October Goes’를 불렀다. 글쎄, Barry Manilow의 팬이라서 그런지 큰 감흥을 못 느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찰라, 이건 또 뭔가! 어느덧 신해철은 무대 위에서 시가와 코냑을 손에 들고 번갈아 입에 대고 있다. 그리고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와 ‘재즈카페’를 불러 젖히니, 팬들이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일어나 환호해 마지않는다. 이번에는 ‘가요 톱10’ 1위곡 메들리라며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인형의 기사’를 선사하자, 이제는 모두 추억을 되짚으며 목청껏 따라 부른다.
2부도 비슷한 컨셉트로 진행됐다. 이번 앨범에 실린 유일한 신곡인 ‘Thank You And I Love You’를 시작으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Something Stupid’ 등 달콤한 노래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든 다음, ‘나에게 쓰는 편지’ ‘도시인’ 등으로 급반전시켰다, 다시 ‘일상으로의 초대’ ‘날아라 병아리’로 보편타당하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신해철은 말했다. “기자들이 왜 재즈 음반을 냈느냐고 하도 물어보기에 ‘미친 거죠’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팬들과는 친구잖아요. 제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은데 일일이 말할 수 없으니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앨범으로 표현한 거죠.” 결국 공연장에 와서야 진솔한 답을 듣게 됐다. 인터뷰하려고 발품 팔았던 것을 생각하면 야속하지만, 가수는 무대에서 음악으로 얘기한다는 차원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것이 공연의 묘미일 것이다.
“요즘 연예 프로그램에 나가니까 또 얘기가 많은데,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여자 연예인들 보려고 그래요. 으하하.”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나의 길에 대해서 방황하다 ‘난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40대가 되면 그 성이 무너지는 걸 알게 돼요. 별거 없더라고요. 그냥 ‘쟤가 저렇게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생각해주세요”라? 근래 자신의 행보를 설명한 그는 ‘My Way’로 멋들어지게 무대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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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콘서트에는 ‘사모님’ 김미려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 듀엣으로 무대에 섰다 | |
솔직히 이번 음반 수록곡을 신해철 버전으로 꼭 들으라고 추천할 생각은 없다. 연주도 훌륭하고 보컬도 멋지다지만, 연주와 보컬이 섞이지 않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단편적으로 과거 ‘절망에 관하여’를 떠올려보자. 그 비장한 사운드와 비참한 노랫말에 신해철의 비통한 음색이 딱 달라붙지 않던가! ‘절망에 관하여’는 다른 어떤 가수가 불러도 그 느낌을 살려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음반은 신해철만의 느낌이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재즈 스탠더드 곡들의 농익은 느낌을 뛰어넘지는 못한 것 같다. 많은 실험적, 기술적, 재정적 도전에도 이번 음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가장 큰 이유도 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그 ‘느낌’을 둘러싼 견해차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2시간 넘게 진행된 공연을 보면서 결국 세상이 그에게 무언가 거창한 답을 바랐을 뿐, 신해철의 마음은 간단명료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이지 그냥 해보고 싶은 음반이었고, 특별한 컨셉트 없는 공연이었던 것이다. 지금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음악, 그렇게 팬들과 도란도란 이런저런 얘기 나누는 공연. 그것이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 뮤지션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아니, 누가 뭐라고 한들 신해철은 “제 맘이에요”라고 말하고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다.
앙코르곡은, 이번에는 부르지 않겠다고 밝힌 각종 기사를 뒤로하고 역시 ‘그대에게’! 첼로와 바이올린, 플루트 선율에 내달린 ‘그대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개인적으로 신해철의 뿌리 깊은 자유의지, 남다른 인생철학을 발견한 데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앗,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이제 그만 넥스트로 돌아와 달라’ 애원하는 팬이라면 조금만 기다리자. 녹음작업이 시작된 넥스트 6집에서 신나게 때려 부술 것을 마왕이 친히 예고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