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연계 트렌드 가운데 하나는 TV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속 배우들이 직접 무대 위로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소개한 바 있는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의 조재현을 비롯해 3월15일 막을 올리는 <갈매기>에는 탤런트 조민기, <친정엄마>에는 고두심, 그리고 <필로우맨>에는 영화배우 최민식이 무대에 선다. 연기파 배우들의 색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무대일 테니, 관객으로선 무척 탐나는 기회다.
그래서 꼭 보고 싶었던 연극이 있었다. 바로 국민배우 김혜자 씨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다우트(Doubt)>. 40여 년의 연기생활에도 연극 무대에 선, 게다가 날카롭고 철두철미한 수녀 역을 맡은 그녀의 모습에는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무대는 지난 연말 대극장 공연에 이은 앙코르다. 무대 위에 선 김혜자의 모습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방증이기도 한 만큼, 그녀의 연기 전환을 직접 확인해본다.
| 연극무대에 선 김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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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이좋게 사진 찍으면 안 되는데….” 지난 2월 중순 김혜자 씨를 만나러 대학로에 있는 연습실을 찾아갔다. 한 잡지사에서 플린 신부(남명렬)와 엘로이셔스 수녀(김혜자)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겠다고 하자, 김혜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플린 신부와 엘로이셔스 수녀는 절대 화해할 수 없는 사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원리?원칙적인 가톨릭 학교의 원장 수녀 엘로이셔스, 친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재담가 플린 신부. <다우트>는 말 그대로 의혹과 의심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답답한 엘로이셔스가 다정한 플린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그 의혹을 키워가면서 팽팽한 긴장함이 감도는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연극이다.
신기한 것은 이 의심과 의혹의 과정에 객석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뭐랄까, 대충 결말을 알 것 같아 뒷짐 지고 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보니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지적 욕심이 솟구친다. 사람의 첫인상이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도입부에서는 당연히 융통성 없는 수녀가 매력적인 신부를 헐뜯는 것이라 단정했다. 게다가 수녀가 의혹의 시선을 보낼 때마다 신부는 미사 강론을 통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 의혹의 끝은 무엇일까? 엘로이셔스 수녀와 플린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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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린 신부를 철석같이 믿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 또한 첫인상만큼이나 큰 편견이겠지만, 연극 무대에선 그가 터줏대감이라는 지지와 그만큼 훨씬 안정적이고 강한 연기가 인상적인 느낌 덕분이다. 반면 김혜자는 불안하다. 소극장 무대라 무선 마이크를 달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귀를 쫑긋 세워야만 한다. 발성이 덜 된 탓에 갈라지기 일쑤다. 드라마의 일상적인 대화를 들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발음도 부정확하다. 특히 어미 부분 ‘~습니다’가 연변말씨처럼 ‘~슴다’로 들린다. 그녀의 연기에 대해 의문이 커지면서 시선이나 동선처리도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따라서 전반부는 플린 신부가 대세다. 아마 관객 대부분이 신부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의 재미는 의혹과 함께 계속되는 반전에 있다. 그 반전 속에 김혜자는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관객에게 다가와 어느덧 가슴을 두드린다. 후반부, 이제 객석은 신부의 다정하고 매끈한 말솜씨 속에 정말 치밀한 거짓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엘로이셔스의 불안함 속에 사실은 선량한 진실이 담겨있지 않을까 점점 혼란에 빠진다.
| 의혹의 눈초리가 살풍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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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해보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언제나 감사하게도 제가 하면 좋을 것들이 기다꺸고 있어요.” 연습실에서 앞으로 연기 계획을 물었을 때 김혜자 씨가 던진 답변이다. 정말 대단한 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우트>의 엘로이셔스 수녀 또한 그를 위한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한 발성이나 발음은 그가 계속해서 연극 무대에 서는 데 어느 정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우트>에서는 결국 엘로이셔스 수녀의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처음에 미워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인간미 넘치는 개성이 되고 만다.
“엘로이셔스는 약간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여자예요. 누구도 좋아하지 않죠. 그런데 대본을 자꾸 읽다 보니까 이 수녀의 외로움이 굉장히 진하게 느껴졌어요.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외로운 순간이 많은…, 그걸 잡고 매달려봐야지 생각했어요.” 연극을 보고 나서 인터뷰했던 내용을 다시 들어보니, 김혜자 씨의 연기 내공이 느껴지면서 또다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고집스럽게 ‘김혜자’를 보던 기자도 어느덧 ‘엘로이셔스 수녀’에 빠지게 됐다.
“연극은 공부하는 것 같아요. 몇 달을 희곡 하나 두고 집중적으로 연구하거든요. 그래서 그 연습과정이 참 좋아요.” 그녀가 몇 달을 공부해서 올려놓은 110분의 무대, 그 새로운 연기 변신은 앞으로도 지대한 관심을 받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