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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어린이, 자연을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타시마 세이조(田島征三)

타시마 선생님은 환경주의자란 호칭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실제 삶과 작품 경향 모두 환경주의자의 성격을 띱니다. 또한 그림책을 통해 풀어나가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은 평화주의자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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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어린이, 자연을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타시마 세이조(田島征三)


채소들의 대변인, 타시마 세이조가 이야기하는 ‘채소들의 잔치’



요즘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채소를 식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말 농장을 마련해 놓고 ‘채소 기르기’를 체험하게 하는 부모님도 있지만,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님조차도 채소와 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은 이런 부모와 아이들에게 채소에도 계절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채소밭 잔치』란 책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잠시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까요?

“채소의 대변자인 저로서는 참 들었습니다. 수박은 한여름인 8월, 양배추는 봄 양배추와 가을 양배추가 있지만 대개 4월, 옥수수는 가을에 수확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채소라도 언제든지 나옵니다.”(<어린이와 문학(2006년 10월호)>)

1969년 도쿄로 건너와 그림책을 그리던 선생님은 『치카라타로우(힘센돌이)』란 책으로 비로소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도쿄 시내 한가운데 사무실을 차려놓고 열심히 그림 작업을 했겠지만, 어린 시절이 그리웠던 선생님은 도쿄 외곽에 땅을 사서 염소와 닭을 키우고 채소도 직접 가꾸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밭농사를 막상 시작해놓고 보니 생각 같지 않더라는 겁니다. 채소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그런데 병에 걸려 파랗던 잎이 시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혹시 물이 부족한 건가 싶어 잔뜩 물을 주기도 했지만 다시 살아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럼 영양이 부족한 건가 싶어 비료를 잔뜩 주었더니 더 시들어버렸다고 해요. 그렇게 채소와 동고동락한 세월이 무려 15년, 아침 무가 물에 젖어 섹시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선생님은 무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에 혹시 남자친구 만난 거 아니야?” 그렇듯 선생님은 채소와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노련한 농군 그림책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채소밭 잔치』는 선생님의 실제 경험이 녹아든 그림책이지요. 책 내용을 함께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할아버지가 정성껏 가꾼 밭에 채소가 무럭무럭 자랐는데, 채소를 갉아먹는 무당벌레와 채소의 양분을 빼앗는 잡초가 애물단지로 등장했지 뭐예요. 할아버지는 고민이 되었지만, 워낙 잔치와 술을 좋아하는 터라 밭을 내버려둔 채 이웃집 잔치에 놀러 가버렸어요. ‘야호!’ 이제부터 채소밭 식구도 나름대로 잔치를 시작합니다. 점이 스물여덟 개 박힌 무당벌레는 방울토마토 잎을 갈아 잔치를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고, 덩굴여치는 빙글빙글 돌아 춤을 추고, 양파는 마디호박을 두드리며 잔치 소식을 알립니다. 이 소리에 땅속에 있던 감자와 당근도 튀어나와 한데 어울립니다. 한참 신명 난 잔치가 벌어지는데,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밭으로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까지 합세한 채소들의 잔치는 달빛이 비칠 때까지 이어집니다. 수세미의 덩굴에 거미가 실을 뽑아 만든 그네를 타고, 참마와 우엉은 놀고, 이어서 토마토와 오크라 당근도 앞 다퉈 오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뚱보 호박도 낑낑거리며 기어이 하늘로 올랐지만, ‘쿵’ 하고 땅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하필이면 술 취해 앉아 쉬던 할아버지 머리에 떨어졌지 뭐예요.




좀 황당한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돕고 존재 그 자체를 즐기는 상생(相生)의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나요? 그림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보면, 자연물의 색채만큼이나 알록달록함에 눈을 크게 뜨게 됩니다. 경솔한 의인화를 피하려고 채소의 눈과 코를 그려 넣지 않았다고 하는 선생님은 대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채소들의 몸을 정말 날렵하게 표현했어요. 마치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꾸밈없이 그려진 채소들을 보세요. 게다가 고갱 그림의 원시성을 환기하는 시원한 원색을 과감하게 써서 자연의 원시성을 꾸밈없이 진솔하게 표현한 그림에서, 작가인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의 심성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림도 꼭 선생님처럼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배짱 두둑하지요. 선생님의 경험이 녹아든 그림책이니까, 책에서 주책없어 보이는 할아버지, 잔치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이시죠. 그렇다고 그림만 춤추는 듯 율동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채소들의 노랫소리를 옮겨 적은 글 역시 읽는 맛이 대단히 맛깔스럽습니다. 크크, 술에 취한 할아버지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흉내 내는 둥근 호박의 표정이 있는 장면, 정말 압권입니다. 유머가 ‘덩더꿍 쿵더쿵,’ 붓질의 느낌까지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림에서 춤을 춥니다.



자신의 그림책과 이란성 쌍둥이인 타시마 세이조



쌍둥이 형제인 유키히코와 세이조의 추억담을 목가적으로 담은 <그림 속 나의 마을>이란 영화가 2000년에 개봉하였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과 아미앙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 일본 문부성예술선장 문부대신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작품상, 일본 학부모연대 선정 최우수 영화상 등을 수상하면서 타시마 세이조(田島征三)란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요. 1940년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태평양 전쟁 중에 집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고향인 고치(高知)현 시코쿠의 산속으로 이사하게 된 세이조와 유키히코는, 여름에는 강에서 겨울에는 숲 속을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합니다. 개똥지빠귀를 잡아 구워먹기도 하고 손으로 물고기를 낚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러는 맨손으로 장어까지 잡아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쌍둥이 형제는 어린 시절 자연과 벗한 멋진 추억이 누구보다도 많이 있답니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세이조는 오늘날 많은 그림책을 그려 사랑받는, 일본이 자랑하는 그림책 작가가 되었습니다.



세이조의 그림을 이해하고자 다시 영화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시골로 이사 온 쌍둥이 형제는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합니다. 따돌림의 이유를 자신에게 쏟아지는 선생님의 칭찬 탓이라고 생각한 세이조는 정작 그 이유가 자신이 그린 멋진 그림 때문이란 것을 모르고, 교사인 어머니 때문에 아이들이 시샘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이조의 어머니는 도내 대회에 아이들의 그림을 출품하는데, 곧 세이조의 그림만 출품한 것으로 오해받으며 편파적 행동이라고 비난받게 됩니다. 영화는 두 쌍둥이 형제의 숲 속 생활을 신비롭게 보여줍니다. 중세 유럽의 고전 음악이 깔리면서 신비스럽고도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 쌍둥이의 벗이 되어준 센지라는 친구와 함께, 문명보다는 야성의 혜택을 누리고 지내는 꼬마들을 조명합니다.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그림책 작가인 타시마 세이조가 쓴 『그림 속 나의 마을』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세이조는 자신과, 나란히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된 쌍둥이 형제 유키히코에게 커다란 밑천이 되어준 시골 시코쿠의 유년 생활을 총 11개의 장면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동심의 순수함이 은빛 물살 위에서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추억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이 잔잔하고 투명한 물결 위로 굽이쳐 흘러가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시퀀스처럼 이어져 마침내 히가시 요이치 감독으로 하여금 필름으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도록 했죠.

소년 세이조는 어느덧 다마 미술대학 도안과의 학생이 되었고, 1969년에는 도쿄의 히노데마치로 이사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세계적 대도시인 도쿄에 살면서도 염소와 닭을 기르고 텃밭에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며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 아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닌 그는 그림책 작업을 평화를 전개하는 활동으로 생각하여, 베트남 어린이를 지원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반전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전(2004년)이 있었을 때, 일본은 헌법까지 개정하면서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천진하고 발랄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한 타시마 세이조 씨는 자신과 같은 뜻을 품은 그림책 작가 102명과 함께 『온세상 어린이 103인』이란 그림책을 출간했습니다. 다행히 그림책이 잘 팔려서 인세 모두를 유니세프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작년(2006년 8월 말)에 타시마 세이조 씨를 직접 만나볼 수 있었는데, 그때 그분의 인상은 무척이나 수수하고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체크무늬의 반소매 셔츠를 입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키 작은 그분은 웃음도 많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영혼이 참으로 순수한 분이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을 만큼 해맑은 눈빛을 지닌 분이었죠. 그분이 한국에 온 것도,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의 4개국 그림책 작가들이 모여 『평화의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그날 그 자리에는 타시마 선생님 이외에도, 와카야마 시즈코, 타바타 세이이치, 하마다 게이코 작가님과 한병호, 정승각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 밖에도 한병호 선생님과 권윤덕 선생님도 『평화의 그림책』을 함께 만드실 것이라 전해 들었지요.

2006년 8월, <어린이와 문학>이 주관한 ‘『평화의 그림책』을 그리는 일본 작가들’에서 자신의 책 『뛰어라 메뚜기』에 사인을 하는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










타시마 선생님은 환경주의자란 호칭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실제 삶과 작품 경향 모두 환경주의자의 성격을 띱니다. 또한 그림책을 통해 풀어나가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은 평화주의자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타시마 선생님은 평화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강연회에서 어린 시절 잡았던 물고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타시마 세이조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일본에서는 시민운동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여기 참여한 우리(일본 그림책 작가)도 젊었기 때문에 많은 운동에 참여했지요. 요새 젊은이들도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노래하거나 시위를 하거나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일도 없고요, 또 지금 일본에서 헌법을 개정해서 전쟁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세력이 있습니다. 모두 그런 일에 반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나는 반대다’ 하며 외치는 일은 부끄럽다, 고집스럽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호소 방법을 사용해야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 젊은이들이 평화를 바라는 일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질까요?”(‘평화를 그리는 사람들 - 일본 그림작가 4인과 나눈 이야기’, <어린이와 문학(2006년 10월호)>)

타시마 세이조는 지금도 그 방법을 동료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고민한다고 합니다. 한편 선생님은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의 하나로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사는 도쿄에 있는 히노데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폐기물 처리장이 생겼습니다. 그때 나는 불도저 앞에 누워 반년 내내 시위를 했습니다. 누워 지내니까 숲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이나 식물한테 ‘우리가 너희를 지켜줄 테니까, 너희도 힘내’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물론 나무가 말하거나 너구리가 말하는 것은 아닐 테죠. 그런데도 ‘세이조, 영차영차!’ 하고 들리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저는 나무 열매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죠.”(<어린이와 문학(2006년 10월호)>)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그림 속 생명이 펄떡거리는 느낌이 독자에게 강하게 다가갔다면, 그것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된 것이라고 말이죠. 생명이 지닌 강렬함이나 강함, 반대로 절실함이나 연약함은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화가가 살아오면서 경험해 온 많은 것, 이를테면 화가가 울부짖거나 행복해서 기뻐했던 체험이 손으로 흘러들어와 종이에 표현되는 것입니다. 세이조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열심히 살았던 것이 몸속에 스며 있는 것이지요.

직접 밭에서 키운 채소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세이조 선생님이 『채소밭 잔치』가 태어난 배경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타시마 세이조는 1969년에 『치카라타로우』로 제2회 세계그림책원화전에서 황금사과상을, 1974년 『후키마북쿠』로 제5회 코단샤 출판문학상을, 1988년 『뛰어라 메뚜기』로 그림책 일본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무라타 세지와 공동 제작한 『숲으로 찾으러 가자』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그래픽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지나친 집착에 대한 경고



『폭풍우 치는 밤에』로 1995년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과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은 기무라 유이치가 글을 쓰고 타시마 세이조가 그림을 그린 『늑대의 돼지꿈』은 참으로 현란합니다. 전신의 털을 꼿꼿하게 세운 앙상한 몸매의 늑대와 유머러스한 표정의 동물들은 단순한 선을 대신해 강렬한 색채로 채색되어 있지요. 루오의 그림에서처럼 검정 윤곽선 처리된 동물들과 노랑, 파랑, 분홍, 하양으로 반복되는 배경색이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성의 없이 그린 그림 같지만, 대단한 자신감과 노련함으로 그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대 첫 번째, 두 번째 장에서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진 늑대의 뒤집힌 몸과 뾰족한 이빨 사이로 내민 긴 빨간 혀, 삼지창 끝 모양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늑대의 마음을 대신합니다. 또한 늑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통통한 분홍 돼지의 지그시 감은 눈은 참으로 태연하네요. 늑대의 간절함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타고난 행운을 믿고 있음직한 돼지의 모습이군요.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엉뚱한 경험담을 나눠봅시다. 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점심때가 되면 슬슬 배가 고파집니다. ‘어느 집으로 갈까?’ 차의 속도를 늦추며 밥집을 물색합니다. ‘이 집은 된장찌개를 하는군, 여기까지 와서 된장찌개는 좀 그렇겠지.’ 그러면서 차는 차대로, 눈은 눈대로 앞으로 나갑니다. 또 다음 식당이 보입니다. ‘여기는 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데.’ 그러면서 다음 식당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죠. ‘여기는 돈가스? 에고, 속 부대껴서 안 돼.’ 그러다 어느새 5분, 10분이 후딱 지나가고 배는 고픈 정도가 아니라 속에서 부아가 치밉니다. ‘첫 집에서 먹을 걸 그랬네.’ 후회가 시작됩니다. 결국 지쳐 들어간 곳은 첫 집의 그럴싸한 외관이나 주차장에 있던 수많은 차를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첫 집에 대한 아쉬움을 지니고서, 배고픈 대로 입에 우걱우걱 음식물을 넣으며 배를 채우지요.

이 그림책도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사람이 아닌 늑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처음 본 된장찌개 대신 포동포동 살이 오른 새끼돼지가 등장합니다. 꼬르륵 소리가 나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늑대는 숲 속에서 헤맵니다. 좀 더 맛난 짐승이 보이면 ‘꿀꺽’ 해치울 생각인 것이죠. 토끼와 염소, 어미 사슴, 산닭을 만나지만, 어째 늑대에게는 처음 봤던 돼지에 못 미칩니다. 마음속에 품은 돼지를 꼭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늑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갑니다. 어라, 배짱 좋은 새끼돼지가 그만 우거진 풀덤불 속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 버렸네요. 늑대는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섰겠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새끼돼지가 도망갈 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늑대는 벌린 입을 다물고 마는군요. 그때 늑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 거예요. ‘가만있자. 아까 본 그 새끼 돼지가 이렇게 작았나?’ 고개를 갸웃하며 늑대는 새끼돼지를 놓아주죠. 고픈 배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도 망각하게 되는지, 늑대는 터벅거리며 산에서 내려갔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처음에 본 통통한 새끼돼지 생각뿐이었겠죠?



이솝우화처럼 진행되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우선 재미있다고 반응하겠지만, 좀 더 자극을 주면 이내 이야기에 숨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품은 집착이 결국은 허상이었음을 늑대의 돼지 사냥을 빗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이루지 못할 개꿈을 꾸는데, 늑대는 이루지 못할 돼지꿈을 꾸네요. 재치가 넘치는 스토리에 익살맞은 그림이 더해진 그림책입니다.

남을 위하는 방법에 대한 근본적 모색



배고픈 거지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들어 도와주게 됩니다. 추운 겨울날 거지가 자식까지 등에 업고 추운 지하철역 지하보도에 앉아 두 손을 벌리면 ‘저 어린 것이 무슨 업보가 있기에…’라는 생각에 혀를 끌끌 차며 주머니를 뒤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 지하도를 지나며 번번이 전에 본 거지와 어린애가 구걸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는, 또다시 주머니를 뒤지면서도 고민합니다. ‘내가 건네는 이 푼돈이 저들의 배고픔과 헐벗음에 도움이라도 되는 걸까? 근본적으로 저들이 배고픔을 면할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은 아닐까? 아니지. 내가 뭐라고 그런 것까지 참견하고 고민한담. 아니야, 선행을 하면서 조건을 따지는 나 자신이 옹졸한 거지.’ 참으로 많은 말이 내 마음속을 오갑니다.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그들을 볼 때마다 주머니에서 푼돈을 꺼내주는 것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떤가요? 지하철을 탈 때 가끔 아주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는 종이를 승객들에게 나눠주고는 손을 벌리고 물러나지 않으며 뻔뻔하게 구걸하는 사람들 말예요. 정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그들의 염치없는 행동 앞에서는 ‘언제 내게 돈 맡겨놨어?’라며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죠? 왜 끊임없이 상대방의 양심을 스스로 점검하게 하는 걸까요? 맘씨 좋아 보이는 승객 앞에서 그들은 더 오래 서서 두 손을 내밀고, 심한 경우는 얼굴까지 빤히 들여다보며 서 있습니다. 어쩌라고요? 맘씨 좋아 보이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호감’에 속하는 좋은 인상을 지녔단 것인데요, 그것을 악용해서 그들의 양심을 떠보는 구걸하는 자들의 속내가 사악하고 경박하게 느껴집니다.

『맘씨 좋은 고양이 호루스』도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맘씨가 좋아서 스스로 착한 일,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고양이 호루스는 동네 고양이가 아프면 대신 쥐를 잡아주고, 다리 다친 고양이가 낳을 때까지 대신해서 먹이를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호루스란 고양이의 선행이 벼룩한테도 소문이 났는지, 스스로 열심히 배고픔을 면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벼룩 한 마리가 호루스에게 피 한 모금만 달라며 부탁합니다. 고양이는 마지못해 피 한 모금을 벼룩이 빨게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벼룩은 새끼 열 마리를 데려와선 고양이에게 또 피를 부탁합니다. 맘씨 좋지만 거절할 줄 모르는 호루스는 또다시 자신의 몸을 내주고 피를 빨게 합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새끼 열 마리가 새끼를 10마리씩 낳아 무려 111마리가 되어 호루스 앞에 나타나 뻔뻔스럽게도 또 피를 부탁합니다. 호루스는 벼룩에게 뜯기고 피를 빨리면 자신의 몸이 심하게 가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차마 거절 못 하고 이번에도 피를 빼앗깁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뻔뻔한 벼룩이라고 하더라도, ‘벼룩 같은 녀석’이라는 속담을 떠올려보면 용서됩니다. 그런데 100마리의 새끼가 또 새끼를 낳아 1,000마리가 되었으니, 무려 1,111마리의 벼룩이 우르르 몰려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호루스의 등에 오르려고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호루스도 이제 더는 자신의 등을 내놓을 수 없었는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물속으로 줄행랑쳤습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호루스가 본 것은? 자신이 뛰어든 물 위를 동동 떠내려가는 벼룩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배고픔을 해결하지도 않고, 마냥 남의 피나 빼앗아 먹는 벼룩에게 호루스는 세 번의 선행을 몸소 실천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그들의 요구에 넌더리를 쳤지요. 과연 호루스가 잘못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례한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하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니까요. 문제는, 선량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마냥 이용하려고 드는 벼룩 같은 사람(여기서는 벼룩 그 자체지만)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림책 뒷면을 이용해 작가는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고양이 호루스가 냇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고양이 호루스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또한 여러분이 벼룩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등등.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아이들에게 10의 배수라는 수학적 개념도 알려주는 그림책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 사람됨의 조건 등에 대해 난해한 철학적 사고를 던져주는 만만치 않은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현란한 색채를 씁니다. 또한 특유의 익살맞은 표정을 살리고 아이가 그린 것처럼 순수함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제는 그가 그린 그림책의 특징이 분명해지는군요. 강렬한 배경색과 재미있고 순진한 인물 묘사, 단순화한 처리…. 여러분이 저처럼 직접 타시마 세이조 씨를 만나보셨다면, 그림과 사람이 어쩜 저리도 닮았는지 무릎을 치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평화의 그림책』을 그리는 타시마 세이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싣지는 못했지만 최근 번역 출간된 『뛰어라 메뚜기』 역시 많은 어린이의 사랑을 받는 그림책입니다. 가식 없는 삶, 가식 없는 그림으로 자신의 삶 철학을 실천하는 타시마 세이조, 일본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멀리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려준 멋진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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