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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나가던 형사, 모든 것을 잃은 뒤 선택은?

『무덤으로 향하다』, 선택의 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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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한때 형사였다. 가정도 있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형사. 그러나 임무 수행 중 쏜 총에 맞은 무고한 소녀가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스커더는 입에서 술을 뗄 수 없었다. 끝없이 무너져내리던 스커더는 결국 직장과 가정 모두를 잃게 된다.

나락으로 떨어진 다음에는, 단 두 가지의 선택만이 남는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다른 하나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통스러워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내가 지나온 거리를 알 수 없어도 그저 나아가는 것. 바닥에 떨어진 후 한참동안은, 둘 중 어느 선택을 하더라도 큰 차이는 없다. 여전히 고통스럽고, 어디에도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된다. 내가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한때 형사였다. 가정도 있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형사. 그러나 임무 수행 중 쏜 총에 맞은 무고한 소녀가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스커더는 입에서 술을 뗄 수 없었다. 끝없이 무너져내리던 스커더는 결국 직장과 가정 모두를 잃게 된다. 그렇게 나락에 떨어진 채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커더는 조금씩 나아간다. ‘친구들을 위해’ 조금씩 일을 맡는 무허가 사립탐정 일을 하고, 형사일 때 알았던 콜걸 일레인과 사귀고, 금주 모임에도 나가게 된다. 하지만 스커더가 탐정 일을 하면서 맡게 되는 사건들은, 뉴욕의 밑바닥에 깔린 가장 비열하고 추잡한 범죄들이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도, 그런 추악한 범죄를 만날 때마다 스커더는 괴로워한다. 다시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매튜 스커더가 처음 등장한 작품은 1976년작 『아버지들의 죄』(The Sins of the Fathers)였다. 그리고 『무덤으로 향하다』는 92년에 나왔다. 현실의 시간만큼 스커더도 성장해간다. 하지만 과연 스커더의 변화와 성장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성숙해 가는 것일까? 국내에 출간된 82년작 『800만가지 죽는 방법』이 말하는 것은, 뉴욕에 살아가는 800만의 사람 모두가 죽는 방법은 다르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 일어나 수천명의 사람이 죽었을 때,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한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는 그런 말을 했다. 그들을 희생자 몇 천 명이라고 부르지 마라. 우리는 그들 한명 한명의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수천 명의 희생자가 얼마나 큰 무게이고, 울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마찬가지다. 누군가 범죄에 희생된다고 해도, 그들은 단순히 희생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름과 가족, 인생이 있는 개별적인 존재다. 그러나 범죄는, 그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이 악하거나 착하기 때문에 그들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있지만, 범죄는, 세상은 그들의 개별적인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아니 그들을 인간으로조차 대하지 않으려 한다. 사악한 범죄자들은 인간을, 사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만을 보면, 세상은 전진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드보일드의 세계관이다.

『무덤으로 향하다』의 범죄는 끔찍하다. 마트에 갔던 아내가 사라진다. 그리고 걸려온 전화에서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40만 달러를 요구한다. 남자는 돈을 전해주지만, 돌려받은 것은 몇 개의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토막 난 시체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마약상이었다. 경찰에 알리지 않고, 그의 형을 통해 스커더에게 연락을 한다. 범인을 찾아달라고. 물론 사립탐정이 의뢰인의 직업을 탓하는 건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범죄를 저질러달라는 것도 아니고, 범죄피해자로서 범인을 찾아달라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스커더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난 아직도 경찰 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반면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많이 변하기도 했다. 그러니 왜 이제 와서 사소한 일에 구애받겠는가?’

스커더는 사건을 맡는다. 그리고 과거의 동료형사와 거리의 아이인 흑인 소년 티제이, 티제이가 데리고 온 해커 등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추적한다. 스커더의 방식은 가장 일반적인 사립탐정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말하듯 스커더는 집요하다. 본능적인 직감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추리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다만 꾸준하게 찾아간다. 존재하는 증거를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꾸준히 파고들어 단서를 잡아낸다. 아무래도 1992년에 나온 작품이니만큼, 범인들은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티제이가 데리고 온 해커들은 전화국 시스템을 이용해서 범인들의 위치를 찾아내는 구식의 방법이 사용된다. 요즘 같으면 선불 핸드폰을 사용하고, 걸려온 전화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텐데 아무래도 고전적인 방식이다. 이미 옛날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무덤으로 향하다』는 그리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800만가지 죽는 방법』『무덤으로 향하다』이 출간된 시차도 10년이지만, 그다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스커더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뀐 게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누구나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인터넷으로 수많은 정보를 찾아내고 있지만, 범죄란 건 똑같다. 『무덤으로 향하다』의 범인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범죄는, 2011년 지금 벌어져도 똑같이 잔혹하고 비열한 짓이다. 그들의 생각이나 말도 그렇다. 범인은 말한다. 그것들은 그저 인형일 뿐이라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사물, 대상으로만 보는 이들이 바로 사악한 범죄자들이다. 꼭 사람을 토막 내 죽이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 세상에 절망하여 매튜 스커더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물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무고한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여. 이 세상의 완벽한 패배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스커더는 다시 세상과 직면하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그리고 문제들을 해결해 간다. 스커더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은, 마치 그의 인생의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언젠가는 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의논하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에 하나씩 서서히 대처해왔다…큰일도 그렇게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상사는 그렇게 돌아간다.’그렇게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커다란 것들도 해결된다. 스커더의 인생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슬프다. 스커더 같은 인물이 그토록 고뇌하고 괴로워하면서, 겨우겨우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하지만 로렌스 블록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 전체에 그런 사람들을 깔아놓았다. 그의 세계에서 완벽한 인간은 없다. 영웅도 없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언제나 깔끔하고 화려하게 살아가는 여피족 같은 것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에 존재하지 않다. 스커더는 일레인을 사랑한다. 그런데 그녀는 콜걸, 그러니까 창녀다. 돈을 위해서, 모르는 남자에게 몸을 팔았던 여자.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스커더는 그녀의 직업을 존중했다. 스커더는 자신이 그녀를 온전하게 소유하는 것이 과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알콜중독자,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패배자가 한 여인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한걸음씩 가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들부터 해결해 나가는 것. 그렇게 가다 보면, 가끔은 행복도 찾아온다.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자신이 이루는 것들에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단지 원하기만 하는 것?로는 부족하다. 스커더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걸어왔던 것이다. 다행히도 『무덤으로 향하다』의 사건이 해결된 후, 스커더와 일레니의 관계는 좀 더 진전된다. 그들에게 희망이,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덤으로 향하다』는 잔인한 세태를 보여준다. 비정한 사회에서 고꾸라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렌스 블록은 그렇게 나동그라진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을 추스르며 일어서는 과정들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한, 그렇게 쉽게 붕괴하지도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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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무덤으로 향하다

<로렌스 블록> 저/<박산호> 역12,4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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