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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서의 목선: 고난 앞에서 존엄을 잃지 않는 이의 초상

가늘되 당당한 목선으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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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2017)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최희서는 후미코의 결기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낸다.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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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출신 아나키스트 청년 박열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거리로 나가면 조선인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자경단원들이 득시글거리는데, 거사에 쓰려고 직접 만든 폭탄은 터지지도 않는다. 제 목숨 말고는 잃을 것도 없는 박열은 발언권을 얻기 위해 제 목숨을 건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정이 좀 달랐다. 가부장적인 천황제 파시즘 체제에 맞선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던 후미코는 온전한 활동가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연인’인 박열조차 위험한 일에 연인을 끌어 들이기 싫다는 생각에 폭탄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함구했고, 예비 검속으로 불령사 조직원들이 경찰에 잡혀갈 때에는 “일본인들은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활동가이기 이전에 여자이고 일본인이니까. 그렇게 앞장 서지 않아도 된다고. 여느 사람이라면 물러설 곳, 숨 돌릴 여지라 판단했을 것을 후미코는 단호히 거절한다. 후미코는 박열의 뺨을 올려 붙이며 “운동 활동에서는 내가 여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따져 묻고, 조선인 불령사 조직원들의 만류에도 웃으며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
 
이준익의 영화 <박열>(2017)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최희서는 후미코의 결기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낸다. 박열(이제훈)과 시선을 주고 받으며 암호처럼 찡긋거리는 코, 정신감정을 위해 혈액과 소변 샘플을 좀 채취하자는 예심판사(김준한)의 회유에 “그거 주면 맛있는 거 주나?”라고 되물으며 상대의 말문을 틀어 막던 순간의 천진난만한 눈빛, 자신을 희롱하는 형무소장(요코우치 히로키) 앞에서 죄수복 앞섶을 풀어 헤치는 순간의 단호하고 절제된 팔동작. 그러나 으뜸은 역시 그의 목선일 것이다. 후미코는 영화 내내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의 목은 가늘되 누구 앞에서든 곧고, 유연하되 어떤 상황에서든 비굴하지 않다. 후미코가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글로 기록하는 경우다. 철저히 동지로서 동거한다는 요지의 동거 3원칙을 써 내려가는 순간이나 옥중에서 자서전을 쓰는 순간, 후미코는 원고지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당당했으나 자신이 세운 원칙과 사상 앞에서는 겸허했던 사상가이자 활동가 가네코 후미코의 초상을, 최희서는 가늘되 당당한 목선으로 완성했다.
 
생각해보면 <동주>(2015)의 쿠미 또한 그랬다. 윤동주(강하늘)가 잡혀가던 마지막 순간, 쿠미는 비극을 예감하면서도 어서 도망 가라거나 어쩌면 좋으냐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자신이 여기 온 이유, 윤동주의 시집을 세상에 내겠다는 목적을 완수하는데 전력하기 위해 시집의 제목을 묻는다. 슬프지만 휘어져 우는 것은 결연히 거부하는 애이불비(哀而不悲)를 담담하게 표현한 최희서가 아니었다면, 영화의 엔딩은 다소 그 응집력을 잃었을 것이다.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자의 당당한 고개를 연기할 줄 아는 최희서의 목선이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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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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