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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보다 유대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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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계절보다 일 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 기후나 옷에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아열대 날씨가 사람 살기에 더 적합하거나 편할 수 있다.

원 말레이시아 1Malaysia

 

남녀, 여행사정 21-01@쿠알라룸푸르.jpg

너희들이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를 배운다는 그 아이들이구나!

 

순혈주의 속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 들리는 ‘단일민족’이나 ‘한민족’이니 하는 단어를 의심하지 않았다. 동일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라면 ‘한민족’이라는 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텐데 문제는 ‘단일민족’이라는 뜻 안에는 혼혈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작 나부터 통일신라 때 중국에서 넘어온 집안 사람이니 순혈주의는 허상일 뿐이고 민족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된 오류였다. 뭐, 덕분에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피부색 다른 사람들이 자리 잡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고, 한민족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싶어진다.

 

아무튼 한국이라는 독특한 사회에서 살아서인지 외국 여행 가서 생김새는 물론 언어도 다르고 심지어 종교까지 다른 이들이 한 나라에서 어울려 사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민족이 잘 어울려 사는 모습은 늘 당황스럽다. 멀리 유럽이나 미주까지 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아시아 국가에도 이런 나라를 찾을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이다. 말레이계 승무원의 안내로 비행기에서 내려 중국계 세관 직원에게 입국 도장을 받고 인도계 택시기사의 운전하는 차 안에 앉아 숙소로 향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곳이다. 쿠알라룸푸르 안에는 경중국계가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과 인도계 경제 중심인 ‘리틀 인디아’는 물론 이곳에서는 소수자인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코리아타운’도 존재한다. 여러 민족이 모여 다양한 문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숫자에 입이 벌어졌다. 공식 언어는 말레이계 민족이 사용하는 말레이어와 오랜 영국 식민 생활의 영향으로 영어도 공식 언어이다. 여기에 더해서 경제권을 잡고 있는 중국 화교계의 중국어도 자연스럽게 쓰이고 영국 식민 시절 노동력으로 강제 이주시킨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도 상당해서 유치원에서 타밀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면 말레이어와 영어는 기본이고 큰 노력 없이 중국어와 타밀어까지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

 

여행자에게 이들의 다민족 사회로 가까이 다가가게 해 준 건 역시 음식이다. 야시장에 가면 말레이 전통 음식부터 이슬람계의 할랄 푸드, 중국계의 중화요리, 인도계의 힌디 음식 등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이 모여 각자의 음식을 만들어 내면 세계 최고의 음식도 내놓을 만도 한데 딱히 기억나는 맛이 없는 것을 보면 섞이는 것이 능사만은 아닌가 보다.

 

음식과 언어 문제는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어서 말레이시아가 아니어도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다르다. 중동에서는 같은 이슬람이라도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뉘어 옆 마을을 살육하기도 하고, 다른 신은 인정할 수 없다고 불교 사원에 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써놓고 오기도 하는 것이 종교이다.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이나 도시 곳곳에 도교 사원과 불교 사원이 있다. 유럽 식민지배를 받은 흔적으로 가톨릭 성당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볼 수 있으며 힌두 사원인 바투 동굴은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다민족이 언어, 문화, 종교까지 공유하며 조화롭게 사는 모습은 말레이시아에서만 볼 수 있다. 외국인이 귀화해도 한국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 나라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어떤 불만이 담겨 있을지 모르겠으나 여행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여러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거부감 없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상

 

남녀, 여행사정 21-02@쿠알라룸푸르.jpg 
MALAY(말레이계) S(SINO, 중국계) I(INDIA, 인도계) A(ALL, 그 외 소수민족)이 합쳐져서 말레이시아 Malaysia!

 

이번 대선 후보자가 자기는 ‘재벌이 부럽다’며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 살 수 있냐’고 재벌을 향한 애정을 거침없이 드러내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물질을 향한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저 말이 거북스러운 이도 있을 테고 솔직한 언사를 환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건 마음속 품고 있는 어떤 욕망이 투영된 결과이다. 재벌을 향한 후보자의 애정은 정치나 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자본의 힘을 동경한다는 노골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욕망을 ‘실현’하는 것에 큰 만족을 누리는 나 같은 사람은 좀처럼 ‘부러움’이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작은 결혼식도, 세계여행도, 소박하지만 조화로운 도시의 삶도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봤자 ‘마농 Manon’ 같은 친구를 만날 때면 질투가 나서 한국사회의 ‘단일민족주의’와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둘 다 한국 사람일까를 탓하기 일쑤다. 마농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여권을 가지고 있고 아빠 엄마 국적에 따라 독일과 영국 여권도 지닌 친구다. 당연히 모국어인 프랑스어 외에도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며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도 높다. 이중, 삼중 복수 국적의 친구들이 ‘단일민족’, ‘단일 국적의 부모’를 가진 나를 부러움의 늪으로 빠트린다.

 

가까운 말레이시아를 봐도 토착 민족인 말레이시아계, 청나라 때부터 이주해 온 중국계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강제로 이주당한 인도계로 구성된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을 당시, ‘I Malaysia: People First, Performance Now’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민족화합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인종 간의 갈등을 예방하고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많은 민족이 어울려 사니 소수 민족의 불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와 가지각색의 생김새에 정신이 혼미해 지다가도 우리가 학습해온 대로 ‘단일민족’이 꼭 자랑스러울 만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마치 ‘사계절’이 있어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옷이 많이 필요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고 너무 덥고 너무 추운 극단의 환경이 인간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사실 사계절보다 일 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 기후나 옷에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아열대 날씨가 사람 살기에 더 적합하거나 편할 수 있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 많은 과학자가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북방계와 남방계의 다양한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고 밝혀왔다. ‘단일민족’은 고리타분한 이데올로기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권 후보자들의 ‘정착이민’- 우리나라는 10년 까지만 이주 노동을 할 수 있고 그 이후 강제 출국시키거나 불법 신분자로 만든다. -을 허용하지 않는 이주민 정책은 여전히 답보 상태라 안타까움을 준다. 내 친구 마농처럼 혹은 말레이시아인처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의 유대감이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자각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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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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