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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애란과 함께한 ‘2015 예스24 문학캠프 양평’ 스케치

2015 문학캠프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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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던지는 기분으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이제는 농사를 짓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네 권 쯤 내다보니 실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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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예스24가 주최하는 문학캠프가 올해는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 양평에서 열렸다. 이번 문학캠프에는 ‘한국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로 뽑힌 김애란 작가와 더불어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작가가 자리했다. 특히 김애란 작가는 지난 8월 4일부터 24일까지 예스24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를 실시해, 전체 투표자 27,047명 중 7,820표(8.5%)를 얻으며 1위로 뽑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설문에 응모한 독자 가운데 약 100여명이 선정되어 문학캠프에 참여했다.

 

첫날 먼저 도착한 곳은 황순원소나기마을이었다. 올해는 황순원 탄생 100주기로 황순원소나기마을을 방문한 것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이후 자리를 옮겨 독자들은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작가와 함께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소설이란 무엇인지,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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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이야기자체에 관심이 많았어”


세 작가는 독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전한 후, 제일 먼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성중 작가는 “첫 소설은 소설쓰기의 말문을 틔워준 소설”이라고 설명하며 “그 소설을 씀으로써 소설을 쓸 줄 알게 되었”다고 먼저 말했다. 동경에 그치지 않고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을 때 소설을 쓰게 됐다는 것이었다.


“소재, 주제가 아니라 그 작가만의 발성, 리듬 같은 것이 생겨날 때 소설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습작품이 더 많더라도 첫 소설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쓰다 만 부러뜨린 글들이 많이 있었고, 마침표를 찍은 첫 소설이 등단작이었기 때문에 그 소설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손보미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도 세계 미스터리, 귀신 이야기책처럼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만화책을 엄청 많이 읽었어요. 그때 어렴풋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도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아니었어요. 후에 작가가 된 후 친구가 ‘나는 네가 작가가 될 줄 알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도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걸 좋아했대요.” 

 

정용준 작가에게는 소설쓰기 이전에 독서가 있었다. 텍스트가 귀한 군대 안에서 독서는 자기 시간이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때 만난 한국 문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전까지는 악인, 선인이 분리되고, 끝이 확실한, 해석이 쉬운 이야기들이었는데요. 군대에서 읽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같은 것들은 다 기분이 이상한 채로 끝나는 것이었죠.(웃음) 인물과 상황이 계속 생각났어요. 독서를 하면서 어느 순간 소설이란 형식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학교에 소설 수업이 있어서 그때 처음 글 쓰는 사람을 만나게 됐죠. 소설가 이승우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렇게 멋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웃음)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과 이십 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용준, 내 소설은 “먹기 싫은 음식”


그렇다면 이 ‘젊은’ 작가들이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은 무엇일까?


먼저 손보미 작가는 소설가 이인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인성 선생님이 제게 ‘너는 너무 많이 쓴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단순히 작품 수를 말씀하신 것 같진 않아요. 저는 늘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하고 꽉 찬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 구조도 빽빽한 편이고, 단편에 비해 등장인물도 많은 편이고, 겹쳐서 일어나는 사건도 많은데요. 음식으로 치면 되게 단 음식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장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담백한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책을 덮고 나면 인간이란, 삶이란 이런 건가보다 라는 것을 아주 천천히 느끼게 하는 그런 작품이요. 길게 보면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많이 생각해요.”

 

김성중 작가 역시 손보미 작가의 답변에 이어 음식 비유로 답했다.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작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제 문학적 영웅들은 모두 재미있는 소설들이었어요. 좋아하는,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의 첫 번째 모델은 모험소설이에요. 많은 인물이 나와서 함께 이런 저런 사건을 통과해나가는 『돈키호테』 같은 소설이요. 그동안은 제가 뭘 잘 쓰는지 모르고, 간 맞출 줄 모르고 그냥 이런 식자재를 갖고 써보자는 생각으로 쓴 것 같아요. 써보니 이런 건 못하는구나, 하는 걸 알아갔던 것 같고요. 좋은 책은 하나의 인생을 잠깐 살아본 듯한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 모험이 가득한 서사를 한 번 써보고 싶어요. 물론 간 맞추기는 평생 할 거고요. 여러 식자재를 다 사용해보고 싶어요.”

 

정용준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먹기 싫은 음식”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고 전했다.


“독서를 통해 얻은 유산이 소설 쓰기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읽으면서 배웠던 것들은 사건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기사, 에세이 등으로 인간을 다룰 수 있지만 소설만큼 그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장르가 있나 생각이 들어요. 제 소설에서는 항상 그 인물의 실존, 그 인물이 갖고 있는 실재를 좀 다루려고 애를 썼어요. 제가 비관적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 인물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면 다 슬프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이런 걸 쓰고 싶지 않지만 이것만 쓰고 재미있는 걸 써보자고 하면서 계속 글들이 유예됐던 것 같아요. 단편의 경우는 그렇고, 장편은 다릅니다. 장편에서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싶어요.”

 

문학의 역할, 소설 쓰는 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눈 후 독자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드물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니만큼 세 젊은 작가들이 좋아하는, 추천하고 싶은 책을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논픽션을 좋아한다는 손보미 작가는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를 꼽았다. 20대 중반 처음 읽은 그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해 『화성의 인류학자』, 『깨어남』 등을 소개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들이라 곁에 두고 계속 읽는다고 설명했다. 김성중 작가는 추천해서 실패한 적 없던 소설로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소설 역사상 가장 멋있는 남자 주인공으로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을, 인생에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소설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꼽았다. 정용준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으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을,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한 책으로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소개했다.

 

젊은 작가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독자들은 조를 나누어 김애란 퀴즈대회를 즐겼다. 1등 조에는 김애란 작가 도서 네 권과 세계지도를, 2등 조에는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도서 세 권과 소설학교 책 노트를, 3등 조에는 영화예매권 2매가 경품으로 주어졌다. 독자들은 김애란 작가 애독자임을 증명하듯 작가와 작품에 관한 난이도 높은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며 실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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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미래, 김애란을 만나다


드디어, 김애란 작가와 만나는 시간. 독자들은 큰 환호와 박수로 작가를 맞이했다. 김애란 작가와의 이야기에는 송종원 평론가가 진행을 맡아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애란 작가는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요 며칠 하늘이 좋아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하늘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어요. ‘한국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했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했는데요. 새 책을 들고 만났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 여러분을 만나니까 빨리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약 1시간 50분 간 진행된 행사를 통해 김애란 작가의 깊은 속내와 문학에 대한 생각, 작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김애란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작가를 문학적 방향으로 이끈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대학교 3학년 때 대산대학문학상이 처음 생겼어요. 과실에서 밤을 새워 쓴 원고를 들고 광화문까지 직접 가서 접수를 했던 기억이 나요. 접수를 하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밀려와서 함께 간 후배와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도 나고요. 이상한 간절함과 서러움, 자기 연민이 밀려들면서 햄버거를 넘기는데 왜 그렇게 목이 메었는지요. 사심 없이 냈다가 꼭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었어요. 등단 소식이 특별했던 건 단순히 좋은 소식이어서가 아니라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과 훨씬 나쁜 소식 뒤에 온 좋은 소식이어서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문학적 간절함이 생기게 되었나?


목표를 항상 작게 잡았어요. 작가가 되겠다, 이전에 청탁을 한 번 받으면 다음 목표는 또 청탁이 있었으면 좋겠다였고요. 책을 내면 한 쇄가 다 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목표를 잡았는데요. 그게 운 좋게 이어졌어요. 그때도 직업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한예종이 배출한 스타가 장동건과 김애란이다.(웃음) 한예종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나?


부모님은 제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어요. 시골 분들이라 교사라 하면 껌벅 죽으셔서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하시면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릎 꿇고 전화 받으시는 분들이신데요. 이런 학교가 있다는 건 고3 때 우연히 알게 됐어요. 당연히 반대하실 거라 생각해서 물어도 안 보고 몰래 원서를 냈어요. 합격하고 시골 삼거리에 플래카드가 붙었어요. 그때까지 말씀을 안 드렸었는데 그걸 보고 학교로 찾아오셨어요.

 

소설 속에 가족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각각 작품의 가족들이 일관성 있는 모습도 있는데 실제 가족 모습과 닮았나?


네. 특히 『침이 고인다』『달려라 아비』에 비슷하게 들어갔고요. 어머니는 20년 넘게 손칼국수집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발사를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세요. 「칼자국」의 배경도 실제로 있던 가게고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미녀와 입 맞춘 후 왕자로 변하지만 저희 엄마는 숫기 없고 수줍은 아가씨였다가 아버지와 입 맞춘 뒤에 슈퍼우먼으로 바뀌셔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부모님도 작가의 작품을 읽나?


네. 제게 글 안 썼으면 사람 구실 못했을 거라고 농담도 하세요.(웃음) 대학 때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이 집에서 책 보고, 글 쓰고 하니까 어머니가 ‘너만 보면 답답하다’하셨다가 데뷔하고 상금을 드렸더니 ‘앞으로 글만 써라’하셨어요. 특히 어머니는 당신이 등장하는 장면 좋아하시고요. 「칼자국」에서 엄마가 죽는 장면 보고 오열하셨다고 말씀하세요. 그렇지만 연예인도 죽는 연기하면 재수 좋다더라, 하면서 쓰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 작품이 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동네에 자랑하고 싶으신데 신문 카피들이 ‘명랑한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하는 식이어서요. 소설일 뿐이라고 변명을 했더니 괜찮다고, 자기 이야기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으라고 하셨어요.

 

쌍둥이 언니에게도 소설을 보여주나?


제가 원고 보여주는 사람이 같이 사는 사람과 제 쌍둥이 언니인데요. 데뷔할 때부터 많이 보여준 것 같아요. 언니는 국문과를 나와 잘 봐주기도 하고, 자기가 고급독자라고 생색내면서 봐줘요. 바닷가가 배경이라면 제가 ‘나물 무치는 손이 야무졌다’라는 표현을 썼더니 여기는 바다니까 ‘미역 무치는 손’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도 해주고요.

 

창작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글쓰기 규칙이 있나?


예전에는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던지는 기분으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이제는 농사를 짓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네 권 쯤 내다보니 실감하고 있어요. 일단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을 활자 보는 일로 하자고 해서 신문이나 책을 보며 시작하려고 하고요. 스크랩도 폴더별로 해두고, 작은 메모들도 예전보다는 부지런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글을 쓸 때 바로 스위치가 켜지는 스타일인가? 진입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글에 집중하기 힘들어서 눈에 띄는 집안일부터 하는 편이에요. 빨래가 있으면 그것부터 개고요. 컴퓨터 부팅하듯이 몸이나 머리를 부팅하기 위해 독서기록장을 써요. 좋아하는 문장들을 타이핑하면서 몸을 풀듯이 쓰기도 하고요. 전날 써놓은 원고를 앞부분부터 다시 타이핑하거나 그런 식으로 해요. 저도 바로 들어가지는 못해요. 

 

한국 문단이 위기다, 소설이 끝났다는 말들을 한다. 문학이나 소설의 종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나?


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보다 문학적 환경이 달라진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아요. 선두에 서서 주도하거나 변화시켰던 소설의 자리는 약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고요. 그것이 만일 정치적, 경제적 환경이 바뀌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뀐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이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여전히 그 안에서 분투하고, 이야기의 지위를 갖지 못한 혹은 가져야 하는 삶은 여전히 진행되는 것 같은데 자리가 약해졌다고 해서 무의미해지거나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분투를 하나?


쾌락을 위해 쓰기도 하고요. 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쓸 때도 있고요.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이 쓴 기사를 봤는데요. 고통에 찬 사람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낸다는 표현을 한 부분이 인상 깊어 메모를 해놨어요. 이것이 어떤 대단한 대안이나 선명한 구원이 될 수는 없어도 눈 감고 시치미도 떼보고 능청도 떨면서 문장으로 꾸리려고 했어요. 소리조차 안 나는 힘든 상황들을 계속 겪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때때로 그 소리를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 말에 기대 건너는 시간들이 있을 것 같고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이것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나 전부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유의미한 이유 중 하나예요. 

 

작가 생활 13년, 슬럼프 온 적이 있는가? 어떻게 벗어났나?


가장 나중에 나온 책 『비행운』이란 단편집 안에 「하루의 축」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그걸 쓸 때 쯤 위기가 왔던 것 같아요. 제 얘기를 쓸 때는 활달하게 농담을 할 수 있었고, 자기검열 같은 것도 덜했어요. 힘들거나 어려워도 ‘어때, 내가 나를 가지고 낄낄대는 건데’하면 됐어요. 내가 궁금해서 썼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쌓인 뒤에 다른 사람이 궁금해서 쓴 이야기들이 『비행운』에 묶인 건데요. 가끔 멋 부리려고 ‘타인’, ‘이해’라는 말도 했었지만 그게 간단치 않은 말이구나, 생각보다 무척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조심스럽기도 하고 상상해야 할 부분도 훨씬 많아서 그때 그랬어요. 어렸을 때 명랑한 것들은 씩씩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똑같은 전략이어도 조금 순진해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때 생활도 변하고 해서 어려웠어요. 하지만 모든 노동에 따르는 피로, 분투들이 있으니까요. 크게 엄살 피우지도 말고 지나가길 기다리자고 생각했는데요.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어느 순간에 점프하듯 벗어나는 게 아니라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이 벗어나는 걸 느꼈어요.

 

자신의 얘기를 쓰다 타인의 얘기를 쓰면서 겪은 어려움을 말했다. 최근 작품으로 오면서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줄어든 것 같다. 소설이 어두워진 것 같은데?


첫 책의 유머러스한 부분은 엄마에게 받은 유산 같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엄마가 농담을 하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안심됐던 기억이 나요. 저도 그 영향으로 썼다가 이게 하나의 틀로 굳어져버리면 씩씩한 나, 쿨한 나처럼 일종의 자기애로 굳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어느 때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인물의 어깨를 툭 쳐주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는 그 슬픔에 조용히 조응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그때 소설의 소재와 형식에 맞게 쓰다보면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소설의 시작이 이미지에서 시작되는지, 소재에서 시작하는지, 화자의 어조를 먼저 떠올리는지 궁금하다.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단순한 이미지나 단어, 문장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단편이라 더 가능했던 것 같아요. 선배 세대에 비해 이야기 주머니가 많이 비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로 글을 꾸리는 것보다 바라보는 시선이나 표현, 문장으로 다르게 써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아무 설계도 없이 첫 문장 쓰고, 괜찮다 싶어 두 번째 문장 쓰고, 또 괜찮아서 세 번째 문장 쓰고, 어쩌려고 이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제 불안과 싸워나가며 썼던 작품들이 있고요. 그 후에는 설계도를 준비해서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요즘은 씨앗 저축을 많이 해놨다가 꽤 자세하게 그림을 그려놓고 시작하는 편입니다.

 

작가에게도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을 것 같다.


이럴 때는 가장 최근작이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하는데요(웃음).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라는 소설이 갖고 있는 상쾌함이 좋아요. 제가 갖고 있는 이야기충동이나 이미지들의 씨앗들도 박혀있는 것 같고, 건강한 느낌도 좋아요. 딱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은 그 단편인 것 같아요.

 

김애란 작품에는 도약이 있다고 비평가들이 말한다. 희망의 기미가 조금씩은 들어있다. 소설을 통해 희망을 말하려는 욕망이 있나?


희망이란 말을 잘못 쓰거나 쉽게, 많이 쓰면 희망 가지고 장사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고 생각해요. 더더욱 소설 쓰는 작가들에게는 순진해보이거나 게을러 보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희망이란 말보다는 인간 내부에 있는 이상한 선(善) 같아요. ‘이상한 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제가 그 선을 당위나 도덕, 목표라고 생각하고 쓰는 말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동시대적인 풍경들을 볼 때 이상할 때가 있어요. 힘 센 누군가가 모든 걸 빼앗아가도 그 사람으로부터 끝끝내 가져가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뉴스를 보고 실감한 적이 있는데요. 그럴 때 희망이란 의당 가야하는 목표거나 당위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간신히, 어렵게 지킨 것이기 때문에 귀한 거예요. 거기까지 가는 동안 생기는 의심, 회의, 실망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의 이름이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 과시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상한 선을 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단편에도 썼지만 그것을 평생 궁금해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작가의 인물들은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같은 세대의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소박하게 제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던 이유가 크고요. 빤히 보다보면 우리 동선 안에도 우리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어요. 변주의 욕구도 있었어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반복하면 나쁜 쪽으로 얘기하면 답습이거나 반복이거나 한계가 되고, 좋은 쪽으로 얘기하면 그 작가의 색깔이거나 깊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안에서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변주하거나 조금씩 제 시간들을 따라가 보는 뜻에서 썼어요.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무엇인가? 한 번에 한 책만 읽는 스타일인가?


고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은 한 책만 읽었고요. 좋아하는 부분은 연필로 밑줄 그으며 봤고요. 책이 더러워져야 제 것이 되는 것 같았어요. 최근에는 여러 권을 보게 됐어요. 읽고 싶은 게 점점 많아져서요. 가장 최근에는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인터뷰집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라는 소설을 동시에 봤는데요. 흥미로웠던 건 실제로 눈이 먼 보르헤스와 눈 먼 소녀가 나오는 소설을 함께 읽었다는 거예요. 나라와 국적이 다른 창작자가 그 환경 안에서 취했던 전략, 고민 같은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들면서요. 우연인데 그렇게 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독자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꽤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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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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