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새롭게 단장한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가 지난 8월 23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올랐습니다. 대학로 창작뮤지컬계 환상 콤비인 장유정 연출과 장소영 음악감독의 작품으로, 안동 이 씨 집안의 ‘썩을놈 석봉’과 ‘죽일놈 주봉’이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3년간 찾지 않았던 고향집에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죠. 꼭 3년 만에 만나는 무대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형식의 작품이, 내용이 아직도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요. 개그맨 정준하 씨부터 연기파 배우 최재웅, 보이프렌드의 동현까지 무척이나 다채로운 빛깔의 배우진도 무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습니다. 특히 <쓰릴 미>의 네이슨, <원스>의 안드레이, <유린타운>의 바비 스트롱으로 작품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이고 있는 뮤지컬배우 정욱진 씨가 이번에는 명문대 출신의 욱하는 동생, 주봉을 연기한다기에 공연이 시작되기 전 먼저 만나봤습니다.
“<형제는 용감했다>가 딱 열 번째 작품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하던 역할의 결과 좀 달라서 처음에는 접근하기 힘들었어요. 전에는 밝고 순수하고 맑고 이런 역할들을 주로 했다면 이 배역은 좀 차갑고 반항적이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크거든요. 그런데 선배님들과 공연하다 보니까 지금은 재미있어요.”
공연이 시작된 지 2주 정도 됐는데, 무대에서 느끼는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처음 대본 읽었을 때부터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공연 들어가니까 관객들 반응도 무척 좋아요. 특히 뒷부분에 반전과 함께 갈등이 해결되는데, 연습할 때 배우들이 울었던 지점에서 관객들도 반응을 보이시더라고요. 신파라는 말에 부정적인 어감이 있는데, 신파는 사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잖아요. 고전은 그 시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이라서, 그런 면에서 관객들이 많이 공감하시는 것 같아요.”
넘버를 보면 ‘죽일놈 주봉’으로 표현되는데,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요?
“고리타분한 안동 종갓집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아주 커서 정말 버르장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인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연습 때 시도해보니까 혼자 너무 튀더라고요. 작품이 전체적으로 진지한 선을 유지하면서도 굉장히 위트 있고 재밌게 푼 부분이 많아서 혼자 너무 ‘싸가지’ 없게 구니까 이상한 거예요. 그 아슬아슬한 선을 찾고 싶어요.”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올해 27살인데, 나이에 비해서도 어려보이는 편이라 주봉이나 과거 <쓰릴 미>의 네이슨을 어떻게 했을까 상상이 안 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교과서에 나올 만큼 착하고 바른 스타일로 보시죠(웃음). 어렸을 때는 많이 놀고,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나쁜 짓도 다 해봤어요. 그런 다음 개과천선했죠(웃음). <쓰릴 미>도 그렇지만 주봉이도 외적으로는 정장 입고, 멋있는 척 하고... 처음에는 너무 불편했어요.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어색했는데, 이제는 좀 익숙해져서 덜 민망해요.”
웃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은데요. 그 웃음 때문에 연기할 때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원래는 개그맨이 꿈이었어요. 제 개그가 여수에서는 먹혔는데, 서울에서는 먹히지 않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굉장히 정갈하고 진중한 면도 있답니다. 그리고 웃는 것과 안 웃는 것의 갭이 커서 그냥 무표정으로 있어도 무대에서 오히려 효과가 있더라고요.”
고향이 여수면 장유정 연출과 동향인데, 특혜는 없었나요(웃음)?
“작품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어요. 연출님도 모르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선배시기도 하더라고요. 사실 연출님 작품은 거의 다 봤어요. 작품들이 모두 시대의 유행이나 흐름을 쫓은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본질이나 기본에서 출발하고 있죠. 그래서 다양한 연령층이 공감하고, 오랫동안 공연되는 것 같아요. 사실 학교 다닐 때는 인물을 찾아갈 때 안경도 써보고 수염도 붙여보면서 연습하는데, 사회에서는 그런 과정을 다들 뛰어넘은 선배들이 많으셔서 저희 나이 배우들이 연습실에서 뭔가 해보기가 민망해요. 그런데 연출님 스타일이 좋았던 건 석봉과 주봉이 극중에서는 다섯 살 차이인데, 실제로 저와 나이가 가장 가까운 형이 10살, 많게는 18살까지 차이가 나요. 그래선지 처음에는 토닥토닥 싸우면 일방적으로 제가 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연출님과 함께 재킷도 입어보고, 구두도 신고, 안경도 써보고 이것저것 함께 찾아가면서 인물에 훨씬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형 석봉 역을 정준하, 윤희석, 최재웅 씨가 맡았는데, 보기에도 무척이나 다른 세 분입니다. 무대에서 주봉으로 만날 때는 어떤가요?
“세 분 모두 에너지가 좋아서 막상 같이 하면 후루룩 지나가요. 형님들이 잘 끌어주시거든요. 일단 준하 형은 덩치도 크고, 표정도 크고, 에너지도 가장 커요. 준하 형이랑 할 때는 형 에너지에 맞춰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재미가 있어요. 희석이 형님은 가장 인물 대 인물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정석대로 하는 재미가 있어요. 재웅이 형은 무대에서 너무 편하게 잘 하시거든요. 일주일 만에 뭔가 또 달라져 있는 거예요. 오늘은 어떤 톤으로, 어떤 호흡으로 하실까, 기대하게 되는 그런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무대에서 세 형을 만나는 재미가 남달라요.”
<형제는 용감했다>가 열 번째 작품이라고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원스>죠. 오디션만 5개월 동안 봤고, 연습 기간도 거의 1년이었는데, 아직도 어깨가 아파요. 그때 악기를 다루다 보니까. 그리고 안드레이가 저랑 나잇대도 비슷해서 더 친근감도 있었고요. 이번에 오리지널 팀 내한공연이 있는데, 저희보다 좀 못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요즘 작품이 정말 다양한데, 열한 번째부터 채워가고 싶은 작품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없어요.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작품을 보면서 꿈을 키웠겠지만, 저는 대학 와서 뮤지컬을 처음 봤거든요. 고향 친구들은 지금도 뮤지컬이라고 하지 않고 연극이라고 해요. 무대에 선 저의 모습을 보면 무척 어색해 하고요(웃음). 어떤 작품, 어떤 역할, 이런 것보다는 그냥 지금, 2015년 9월에 저의 심정과 감성으로 봤을 때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 같아요. <유린타운>과는 성격이 전혀 달라서 <형제는 용감했다>가 끌린 것처럼 항상 다른 결의 역할에 끌리고요.”
팬 카페를 보니까 ‘웃음이 예쁜 남자’라는 수식어가 있던데, 30대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바라나요?
“웃음이 예쁜... 감사하죠. 서른 전까지는 좋은데, ‘예쁜’이라는 단어가 걸려서(웃음). 30대니까 서른은 아니죠? 30대에는 굉장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 제 연기에는 만족해요. 저보다 잘하는 분도 많지만,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늘고 있고. 지금 제 연기가 100점은 아니지만, 제가 하고 있는 연기가 저에게는 100점이거든요. 30대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100점에 가까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기자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주기적으로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는 이 남자가 무대에서는 과연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습니다. 정욱진 씨는 “저는 그 정도까지 변하지는 않아요.”라고 자리를 뜨더군요. 하지만 그는 공연이 시작되자 말끔한 정장 차림에 웃음기 쏙 뺀 얼굴로 ‘싸가지 없는 죽일놈 주봉’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했습니다. ‘역시 배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는 정욱진 씨 같은 배우들의 반전 매력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게 잡던 배우들이 나사를 풀었고, 한복 입은 배우들이 종갓집을 배경으로 생각지도 못한 90년대식 랩과 댄스를 선사하죠. 그리고 그렇게 한껏 풀어헤친 관객들의 마음을 휴머니티로 극적으로 몰아갑니다. 이런 형식의, 내용의 작품이 2015년에도 여전히 재미와 감동을 주는군요. 장유정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살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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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