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원효는 내가 강력하게 사랑하는 한 남자”
『발원』펴내 원효와 요석, 몸과 마음을 나누던 밤
사람들은 그를 파계승이라 불렀다. 김선우 작가에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뜨거운 사상을 안고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그의 곁에는 요석이 있었다.
원효를 만나야 할 때가 왔던 거예요
김선우 작가가 “강력하게 사랑하는 한 남자” 원효. 그는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승려라 추켜세우면서도 ‘결국은 파계승일 뿐인’ 한 남자로 깎아내렸다. 작가에게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의 원효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녀가 아는 한 원효는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 해골에 고인 물속에서 자유와 깨달음을 읽어내는 비약을 이뤘던 그가, 가벼운 바람처럼 일어난 춘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을 통했다니. 그가 요석 공주를 품은 데에는 분명 감추어진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그건 합리적인 의심이기 이전에 굳건한 믿음이었다.
“요석과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러 관점에서의 호기심이 있었어요. 그도 누군가를 사랑했던 한 남자였구나, 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방식에 대한 의심이 있었어요. 해골 물 일화를 통해서 저에게 강력한 도약의 느낌을 주었던 멋진 사내가, 갑자기 춘정이 동해서 여자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 같은 게 있었던 거죠.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어떤 의도로 원효의 행장을 그렇게 정리해 놓았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나의 원효에 대한 모독이야’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작가는 눈을 떠야 했고 귀를 열어야 했다. 원효가 견뎌낸 순간들을 살피고 원효에게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은, 자신 안에 쌓인 원효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다가 때가 온 거예요. 그를 만나야 하는, 그를 써야 하는 때가 온 거죠. 작가들은 그것이 일종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이야기 창고에는 굉장히 많은 소재들이 있죠.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얻은 영감들, 나중에 무엇으로든-시로든 소설로든 에세이로든 쓰여질 수 있는 영감들이 있어요. 그 무수한 소재들 중에 어떤 것이 지금 순간에 책상 앞으로 불려 나와서 함께 세계를 만들어갈지는 알 수 없어요. 그건 운명적으로 온다는 느낌이 있어요.”
『발원』이라는 운명은 2012년 봄에 시작됐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와 불교신문이 공동 기획으로 작가에게 소설 연재를 부탁한 것이다. “어떤 소재든 상관없으니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 주십시오.” 그녀가 부탁받은 전부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금 이 순간 내 창고에서 꺼내야 하는 것은 무조건 원효다. 그리고 요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쟁위원회 위원장이신 도법스님과 불교신문 사장님께서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스님들도 공부를 많이 하실수록 원효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게 되니까요. 원효의 이야기를 쓴다는 게 어려운 일일 텐데 과연 가능할까, 하고 걱정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원효를 연구하겠다는 게 아니고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한 번 그려보겠다는 거니까 괜찮아요’ 라고 말씀드렸죠.”
사상가로서 원효가 가진 깊이는 쉽게 헤아리기 힘든 것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그는 “한국사가 남긴 가장 걸출한 사상가 중의 하나”였고 “한국 철학사를 정리할 때 가장 처음에 놓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철학적 사유들과 수많은 저서들은 한국을 넘어 중국과 일본, 인도에까지 전파되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발원』이 그려내는 원효의 모습은 사상가의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 원효를 복원하다 보니 그의 존재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의 빛깔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 그가 가진 사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심원이었다.
“원효가 탁월한 사상가로서만 존재한다면 저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거예요. 중요한 건 원효가 너무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가 가진 대승불교적 사유는 완벽하게 중생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는 거거든요. 당대의 많은 승려들이 불교를 단지 사유로만 가지고 있었지만 원효는 달랐어요.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을 민중들 속에서 부연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고 살피고 사랑하기를 바랐죠. 자신이 바란 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에요. 당시에는 불교가 왕족의 수호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측면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원효는 백성을 위주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했어요. 그 과정에서 주는 감동들이 굉장히 크죠.”
『발원』은 후회 없는 작품
『발원』에서 원효가 보여주는 사랑은 서로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 요석에 대한 사랑은 중생을 향한 사랑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세속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삿된 것도 아니다.
“원효가 요석과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과정도 중생에 대한 사랑의 과정과 함께 가요. 요석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 사랑에 완벽하게 헌신하는 순간 원효도 훌쩍 커져요. 올곧게 민중을 사랑하는 것과 올곧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원효와 요석은 같이 성숙해갔던 동반자죠. 사랑을 깊고 넓게 가꾸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이 되지 않고, 소유하고자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인간적인 성숙을 위해서 배려하고 응원하는 거예요. 그렇게 동지적인 애정과 남자와 여자로서의 애정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면서 흘러가죠.”
『발원』을 앞에 두고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작가에게서 망설임이나 주저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되살려 놓은 그녀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발원』을 보시면 김선우가 사랑한 원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이라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작가 김선우가 원효를 사랑하는 이유, 그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발원』 속에 새겨놓은 원효라는 두 글자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장에서는 부상당한 적군을 살리기 위해 내달리고, 광장에서는 짓밟히는 백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을 내어놓았다. 그 어떤 존재와 집단 심지어 사상까지도 생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는 신념이 있었다.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고, 모두가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라는 말 속에는 작가 김선우의 목소리가 배어있는 듯 했다. 지금까지 줄곧 그녀가 세상을 향해 외치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조국. 충.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한 줌 지배 귀족의 권력 욕망에 소모되는 가여운 희생을 낳을 뿐이다. 헛된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이는 그대로 고통의 실상과 대면하겠다. (중략) 내게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경계 지어 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아낼 것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 (『발원』 1권 115쪽)
“원효는 제가 계속 이야기해온 사랑의 결정체예요. 제가 이야기해 온 모든 사랑을 요석과 더불어서 가장 강력하고 완전하게 발원을 하고 있어요. 요석과의 사랑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원효는 제가 구현하고 싶은 사랑, 제가 바라는 모든 사랑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그때의 원효가 지금의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 원효에게 세상은 너무나 아픈 곳이었다. 말씀은 사라지고 우상만이 남은 공간, 그 앞으로 모여드는 권력과 재물, 그것이 썩어갈수록 늘어갔던 통한의 목소리.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원효를 지켜보는 일이 힘든 이유는 그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자는 억울하고, 억울한 자는 스스로를 고립된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야 하고, 그를 끌어내리려는 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눈 감지 않겠다 다짐하는 자들은 사냥감처럼 이리저리 내몰려야 하는, 시대의 현실이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발원』을 1년 정도 더 붙잡고 퇴고했어요. ‘소설 속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돈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하면서 쓰고 다듬을 수밖에 없었던 책이에요.”
『발원』은 독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원효를 염원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의 곁에는 왜 그와 같은 이가 없는가, 무거운 탄식이 새어나오게 한다. 그러나 홀로 고통을 짊어진 원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바람이 아닌 이기적인 욕심임을 깨닫게 된다. 어느 한 개인에게만 무게를 지우기엔 너무 잔인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그래서 아프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국가가 맞느냐고, 국가가 왜 있느냐고요. 이런 질문을 하는 때가 왔을 때, 우리는 보다 강하고 자유롭고 사랑의 능력을 많이 가진 개별 개별의 주체가 탄생되도록 집중해야 돼요. ‘국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국가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변형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이 더 강해져야 되는 거예요. 보다 강력한 인문정신을 가진 개인들이 많아짐으로써 강해지는 거죠. 문학을 읽는 것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천명하는 방식이거든요. 내가 속한 사회구조 속에 그냥 복종하면서 살지 않겠다, 나는 나의 자유와 행복을 찾아가며 살겠다, 나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스스로를 일깨우는 게 인문정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어요. 이런 강한 열망을 가진 주체들이 많아지는 사회라면 엉망진창의 국가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강력한 문제 제기가 정치적인 압력으로 전환 가능하니까요.”
원효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주체로서의 선언과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말했다. ‘모두가 자신 안의 부처를 발견하고 꽃피워야 한다’는 그의 말은 곧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퍼져 나가도록 하기 위해 원효는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에 이르는 방법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다.
“원효는 6두품의 신분이죠. 6두품은 귀족의 바로 아래에, 그리고 평민들의 가장 위에 위치해요. 6두품으로서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삶은 이런 걸지도 몰라요. 안전한 상위 0.1%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거죠. 원효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은 건 강력한 주체 선언인 거예요.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많은 시민들이 중산층을 꿈꾸죠. 상위 1%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99%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거라고 사다리타기를 시작한단 말이에요. 이 비루한 체제를 무너뜨리려면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해야 돼요. 그리고 그 결심을 자기 삶으로 전환해내야 하죠. 그런 강력한 인문적 주체들이 많아지면 1%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사회 시스템이 흘러가지 않는 거예요.”
원효와 요석, 몸과 마음을 나누던 밤
원효가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갈 때 그의 곁에는 요석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은애하는 이가 사내로서 멀어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막아서지 않았다. 그가 걸어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만류하지 않았다. “부처의 삶을 이루소서”하고 바랄 뿐이었고 “명경이 되소서. 소녀는 지수가 되겠습니다”하고 뜻을 보탤 뿐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는 이는 원효와 요석만이 아니었다. 요석이 원효라는 운명에 눈뜨기 전, 그녀의 마음속에는 화랑 보현이 있었다. 보현 역시 요석을 사랑했지만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요석은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라 말했지만, 보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는 사람임을.
“원효와 요석은 작품을 쓰면서 완성된 캐릭터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제 마음 속에 ‘내가 사랑한 원효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그가 사랑한 요석이라면, 사랑을 통해서 원효를 완성시킨 요석이라면 이런 사람이야’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 모습이 작품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됐어요. 작품이 진행되면서 의외의 진화를 한 인물은 보현이에요. 아마 많은 여성 독자들이 원효보다 보현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웃음). 처음에 보현은 요석을 정말 친오빠처럼 든든하게 지켜봐주는 남자였어요. 그런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요석을 향한 사랑의 감정, 너무 사랑하는데 가질 수는 없는 남자로서의 보현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걸 지켜보는 것도 작가로서 굉장히 재미가 있었죠.”
『발원』을 출간한 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원효와 요석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작심하고’ 썼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아,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덧붙였다. “완전한 하루였고 영원이었”던 그 밤, 그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그 장면을 그릴까 말까 사실 고민했어요. 왜냐하면 이전의 그들이 유지해 온 관계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굳이 그들의 하룻밤을 쓰기로 결정한 이유에는 작가적인 욕망이 있었어요. 사람과 사람의 몸이 만나는 섹스가 어디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문장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로 남녀의 섹스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문장의 힘으로요. 문장의 힘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있었던 거죠.”
이어서 그녀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동시적으로 만나야 가능한 거잖아요. 그런데 갈수록 몸과 마음이 분리된 사랑이 점점 많아지고, 분리된 사랑 때문에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어진 ‘찢어진 주체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행위로써 드러나지 않는 섹스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이에요.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을 나누고 증진시키고 성숙시키는 행위로써 몸과 몸의 만남에 대한 공감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원효와 요석이 몸으로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몸과 몸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느끼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쓰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요.”
『발원』의 해제를 쓴 철학자 강신주는 자신의 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소설가의 데뷔 기회를 박탈당한 철학자의 행복한 넋두리” 그 속에 담긴 고백은 “왜 나는 원효를 다룬 소설 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김선우 작가와 마찬가지로 “원효와 요석에 관련된 근사한 소설을 하나 쓰는 것”을 바래왔던 그가 증언하는 원효는 『발원』 안의 원효와 많이 닮아있다.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그들 곁에 머물기를 원했던 사람. 그들과 더불어 자기 안의 씨앗을 틔우려고 했던 사람. 짐작컨대 그가 발원했던 바는 김선우 작가가 열망하는 바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개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보다 좋은 공동체를 모색하는 데『발원』이 중요한 추동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를 깨워서 정신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를 바라고요. 『발원』은 이제까지 제가 해왔던 소설 작업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제가 꿈꾸었던 완전한 개인, 제가 꿈꾸는 모습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 글로써 구현 가능한 몸과 마음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거든요.”
이번 작품 안에서 독자들이 ‘강력한 주체가 되는 방법’ ‘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방법’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작가 김선우. 그녀는 문학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책을 잃어버리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예요. 과포화 상태의 매스미디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책을 옆에 두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나를 나로서 잘 존재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가장 강력한 친구이자 도구가 책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중에서도 문학작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통째로 느낌의 세계로 변환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장르예요. 문학작품을 통해서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려는 노력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진짜로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발원김선우 저 | 민음사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요석 그리고 원효]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자 날카로운 산문가 그리고 통찰력 있는 소설가이기도 한 작가 김선우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발원]은 원효와 요석의 사랑 그리고 당시 신라의 사회상과 원효의 사상을 공중제비를 도는 주령구처럼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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