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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다른 고통으로 눈 돌리지 말자”

『다른 길』 출간한 시인, 박노해 이게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 다른 길이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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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다른 길’을 갈망한다. 지금 당장 몸이 매여 기어이 걷고 있는 길이 아닌, 그 어딘가에 존재할 자신만의 길을 찾고자한다. 가끔은 그 ‘다른 길’이 어디 있는지 마음속으로 자문해보지만 쉬이 좌절하고 타성에 젖은 채 살아가곤 한다. 박노해는 그런 우리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희망을 들려준다.



박노해는 군사정권 시절 펴낸 『노동의 새벽』(1983)을 쓴 시인으로 대중에게 가장 익숙하다. 그는 민주화 이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삶의 현장에 함께하는 운동가가 되었다. 그의 신간 『다른 길』 은 지난 3년간 분쟁과 빈곤이 어려 있는 머나먼 땅에서 발 딛고 포착한 삶의 진실들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도, 티베트에서 줌 기능이 없는 카메라를 들고 낯선 삶의 터전에서 현지인들과 삶을 나누었다. 해가 뜨고 지는 자연 속에서 삶을 일구어나가는 이들과 눈빛을 나란히 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자연과 함께하는 고귀한 노동의 하루에서 그가 담아낸 편린은 정답사회에 갇힌 우리들에게 ‘다른 길’을 성찰하게 만들어준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다른 길』


2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은 박노해 사진전 ‘다른 길’을 보고난 관람객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있다. 그들은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마음으로 작가의 눈을 바라본다. 박노해는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할까? 지금이 너무 불행하다”고 토로하는 독자들의 물음에 다른 길로 대답하며 따스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먼저 독자들은 타지에서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 박노해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우리 안에는 아트도 있고 포르노도 있다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이번 신간 『다른 길』 을 내고난 후, 사진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다. 가장 난감한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지 않았고, 사진작가가 되고자 사진을 찍지 않았다. 구도, 빛에 대한 탐미적인 이야기는 내게 의미가 없다. 아름다움은 탐미가 아니다. ‘사진이 좀 성스러워 보인다, 거룩해 보인다, 구도적으로 보인다’ 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 찍었을 뿐이다. 다만 그 순간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들이다. 우리 안에는 아트도 있고 포르노도 있다.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선한 사람은 악을 박멸해버리는 게 아니다. 청결이 멸균이 아닌 것처럼 다 우리 안에 살아있다. 그 중에서 어떤 것들을 주목할 것일까. 그건 바로 순간의 불꽃이 확- 튀기는 영혼의 만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국내에 오면 일체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가끔은 필름 감는 법을 잊어버리거나 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사진기를 다루는 아주 기초적인 테크닉조차 미숙하다. 본능적으로 잘 안 외워진다.”

“어떤 인물을 보자마자 사진을 먼저 찍은 적은 거의 없다. 일단 줌이 되지 않으니 천천히 걸어가서 다가간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오는 이들은 아이들과 개들이다. 개들이 짖으면 앉아서 기다린다. 그러면 와서 으르렁거리다가 동네 개들이 다 모인다. 이렇게 천천히 그들 삶의 일원처럼 느리게 가까워지고, 그 이후에 사진을 찍는다. 가끔 속상해지는 순간도 있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나에게 줄 돈이 없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한나절 내내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를 보고 수고비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우리 삶 속에 깊숙하게 파고든 자본주의에 서글퍼진다.”




잉여에너지는 축적되어 내일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우울의 에너지로 빠져버린다


박노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부품으로 생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살아가는 보통의 삶을 우려한다. 생존이 실존을 넘어서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를 경고하며, 진짜 삶의 목적이 유보당한 채 수단에만 매달리는 사이클을 연민한다. 그는 미래의 불안에 저당 잡혀 현재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귀퉁이에서 다른 방식을 권유한다.

“우리는 우주가 한 번 순환하고 해가 뜨면 하루치의 생명에너지를 공급 받는다. 생명에너지를 오늘 하루에 다 쓰지 못하면 잉여에너지라고 한다. 그것은 다 불사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남은 것이 축적되어 내일로 가지 않는다. 그럼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바로 우울의 에너지로 빠져버린다. 잉여 생명 에너지가 팽배한 사회는 폭력이 깃든다. 버닝아웃 상태에서는 내 자신에 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 생명의 원은 사슬의 강도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약한 사슬이다. 그 때 그게 끊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한 부분만 쓰기 때문에 버닝아웃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머리만 쓰고 눈치만 보고 만다. 그 안에서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사지가 원하는 것, 영적인 에너지와 감성을 전혀 쓰지 못한다. 이것이 잉여에너지다. 한쪽만 닳아버린다. 우리는 그날그날 하루치를 남김없이 써버려야 한다. 비우면 차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하루치의 생을 선물로 받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의 전통 개념에서 미래는 사흘까지만 있다. 내일, 모레, 글피. 3일 후는 먼 훗날이다. 먼 옛날 어른들은 장터에서 인사를 나누실 때 ‘언제 또 볼까’ 이야기를 나누면, ‘먼 훗날’ 봐야지 말씀하셨다. 3일 후를 이야기할 때 먼 삶의 지평성을 바라보는 눈빛을 느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충만하게, 남김없이 사는 것. 이것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미래 계획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하늘의 영역이지 나의 소관이 아니다. 해가 뜨면 그날 하루를 산다. 하루살이 인생이다. 무언가 남겨두지 않는다. 누군가 나 몰래 들어놓은 보험도 싹 없애버렸다. 아프면 아파야 된다는 태도로 살아왔다. 죽을병을 앓았다면 웃으면서 죽는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유보하고 대비하고 축적하고, 축적물로서 두려움과 불안감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인생이 가버린다.”


무지의 다른 이름은 너무 많이 아는 것이다.
지식이 끊임없이 축적되어 자기의 미망에 갇혀버리게 된다.


잉여에너지는 남들보다 더 가지러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어릴 때는 또래보다 앞서가기 위한 선행학습으로 시작해서 어른이 되어서까지 우리 삶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배움으로 스스로를 에워쌓는다. 모든 것이 스펙화 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우기 위한 소비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 더 배워서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인문은 삶이지 학이 아니다. 인문학 상품이 스펙이 되고 경쟁력이 되는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살지도 못할 것들을 잔뜩 머릿속에 집어넣고 입으로 글로 잘 표현하면 대단한 지성인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대는 진리를 살려고 하는 것이지, 알려고 하는 게 아니다. 공부는 옳은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 학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 배움은 삶의 의미로서 배우는 것이다. 지식이 많고 고전을 많이 읽는다고 지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고, 다 똑똑하다. 무지의 다른 이름은 너무 많이 아는 것이다. 지식이 끊임없이 축적되어 자기의 미망에 갇혀버리게 된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사니까...’ 에 굉장히 짓눌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모두는 충분히 각자의 삶에서 고통 받는 중이다.


독자와의 만남이 무르익을 말미에 한 청년 독자가 질문을 던졌다. 젊은 시절 무언가 옳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용기가 부족해서 몸을 사리게 된다는 고민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기에는 두렵고 겁이 난다며 작가에게 삶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질문했다.

“어른 세대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편하고 풍요로운 세대가 어디 있냐고 타박하곤 한다. 많은 이들의 가슴 깊은 고민을 운 좋게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그런 태도는 잘못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비록 타인의 시선에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기 개체로서 아주 힘들게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각자의 삶에서 고통 받는 중이다. 그대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충분히 고통 받고 있다. 다른 고통으로 눈 돌리지 말자. 이미 우주에서 하나 뿐인 존재로서 고유성을 찾으려고, 다른 길을 걷고 싶다. 거대한 사회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동시에 삼투압도 있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사니까...’ 에 굉장히 짓눌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선 자리에서, 내 처지에서 내가 맞서야 할 것, 나를 망치는 것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연습은 중요하다.”

박노해 작가와 함께한 독자들은 각자의 ‘다른 길’을 모색하며 진지한 에너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의 표현처럼 지금 이 순간, 이 지상의 모든 꽃들과 공해에 사라져버린 맑은 별들이 빛나고 있다. 우리는 이 지구를 동행하는 길벗으로 여기고 진짜 자기 삶이 무엇일지 잠깐 거리를 두고 생각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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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 박노해 저 | 느린걸음
15년의 유랑 길이었다. 국경 너머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을 두 발로 걸어온 박노해 시인. “사랑하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지요.” (2011년 아프가니스탄 국경마을에서) 그가 흑백 필름 카메라와 오래된 만년필로 기록해온 ‘유랑노트’가 출간되었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에 담긴 세계는 넓고도 깊다.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땅의 이야기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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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권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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