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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류승완의 펀치와 맷집

‘김태훈의 편견’ ① 영화감독 류승완 자신만의 영화로 세상과 맞장을 뜨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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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3일 수요일, 영화제작사 ‘외유내강’ 천호동 사무실에서 영화감독 류승완을 만났다.

류승완에겐 두 종류의 냄새가 난다. 소년, 그리고 파이터.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시작으로 <베를린>까지, 그는 자신만의 영화로 세상과 맞장을 뜨며 지금에 와있다. 수줍은 소년의 웃음도 여전히 잃지 않은 채. 펀치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며, 맷집이란 쉽게 지지 않겠다는 고집의 결과이다. 이 인터뷰는 바로 그런 두 가지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류승완의 이야기다.




김태훈 : 현재 촬영 중인 3D 단편영화 <유령>은 고등학생들 이야기죠?

류승완 : ‘신촌 대학생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로 바꿨죠. 40분 정도 되는 분량인데,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SNS만으로 대화를 하다가 살인사건까지 이어지는 이야깁니다.

김태훈 : 이야기만 봤을 때는 현재 젊은 친구들의 가장 병폐적인 부분들을 드러내는 사건 같은데요. 류승완 감독님이 겪었던 어린 시절과 비교를 해보면 요새 젊은 친구들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류승완 : 그게, 모르겠어요. 제 어린 시절을 객관적으로 못 보겠어요. 어떨 때 보면 아이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아이, 안 돼’라고 하는데, 사실 저도 다르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하지만, 가장 달라진 게 뭐냐고 했을 때는 인터넷과 SNS인 것 같아요. 저는 SNS를 안 하거든요. 예전에는 좀 하다가 안 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일단 시간을 너무 뺏기고요. 그 다음에 실체를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렇게 나한테 반응하는 사람들이 진짜 이 사람의 반응인지,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거나 보고 싶어 하는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해서 나를 꼬시고 있는 건지. 저는 그게 개인적으로 싫더라고요.

김태훈 : 과거 류승완 감독님과 최근 젊은 친구들의 차이라고 한다면, 직접 사람을 대하는 것과 SNS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차이로 볼 수도 있겠네요.

류승완 : 만약에 제가 어렸을 때 SNS가 가능한 시대였다면, 저도 그런 식으로 소통했을 것 같아요. 분명 과거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인성의 차이는 아닌 것 같아요.


재미있는 액션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었다

김태훈 : 오히려 바깥에서 보면 류승완 감독님이 약간 문제아적인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요.

류승완 : 제가 문제아였을 것 같아요, 과거에?

김태훈 : 네, 고등학교 때.

류승완 : 아닌 거 아시잖아요. (웃음) 저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이었어요. 유령 같았죠. 그리고 때리는 것도 싫고 맞는 것도 싫고, 애들 눈에 띄는 것도 싫고, 그런데 제 주변 환경이 거칠어서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적응하려다 보니까, 조금 그런 세계에서 살았던 것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주 큰 사고는 안 치고.

김태훈 : 그 나이 또래에 할 수 있는 약간의 일탈? (웃음)

류승완 : (웃음) 네, 그렇죠. 약물을 복용하거나 그렇지는 않고(웃음).

김태훈 :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소룡이라든지 성룡 영화에 열광했던 액션 키드였고요. 실제로 무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어요. 사람이 무술을 배운다는 것 또는 그런 영화에 열광한다는 내면에는 ‘지금 현재는 남의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지만 언젠간 나를 드러내고 싶다’라는 욕구가 분명히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되거든요.

류승완 : 그렇죠.

김태훈 : 고등학교 때 꿈꿨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류승완 : 아주 재미있는 액션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그 전에는 액션 스타가 되고 싶었고요. 그런데 그 쪽으로는 내가 별로 재능도 없고 누구도 날 써주지 않을 테니 내가 감독을 해서 영화를 만드는 게 훨씬 빠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죠. 직업적인 문제로 보자면 그런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저와 저희 세대들이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할 때는 대부분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감독이 되겠다고 하는 경우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우리가 어렸을 때 항상 한국영화 보면서 ‘우리는 왜 저렇게 못 만들까’하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전공하려는 친구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감독이 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김태훈 : 감독이라는 지위 혹은 역할에 대한 동경 때문이군요.

류승완 : 그렇죠. 언론에서 소위 스타 감독이라고 하는,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김지운 감독 보면 멋있잖아요. 돈도 많이 버는 것 같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것 같고요.

김태훈 : 류승완 감독님까지 네 분이서 맥주 광고도 찍고 그러셨는데(웃음).

류승완 : 그건 기부용이고요(웃음). 아무튼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거죠. 요즘에 같이 일하는 친구들하고도 얘기를 해보면, 좀 놀랐던 게 쉼 없이 영화를 만드는 친구들이 있어요. 우리 때는 영화 한 편 만들면 진이 빠져서 다른 일을 좀 했죠. 워낙 돈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해야 생계가 유지 됐거든요. 물론 지금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정말 직업적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현장에 많아졌더라고요. ‘이게 좋은 현상인가?’ 그런 생각도 좀 들어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김태훈 : 류승완 감독님의 데뷔에 대해선 정말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선배 감독님들한테 남은 짜투리 필름을 얻으러 다녔다는.

류승완 : 당시 제가 워낙 모자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대상 혹은 환경이 있다면 어디든지 찾아갔던 것 같아요. 일단 정수리 보이면서 인사부터 하고(웃음). 무조건 형 동생 맺고 따라다니고요. 그게 좋은 걸 수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때 자존감이 없었어요. 일단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 강박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일정 부분 노동, 산업, 비즈니스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예술의 영역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너무 자존감 없이 살았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좀 들어요(웃음).

김태훈 : (웃음) 자존감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한 간절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류승완 : 예전 기억이 나는데요. 잠실에 살 때, 잠실본동에 전영록 선배가 ‘비디오’라는 큰 비디오 숍을 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전영록 선배가 비디오 가게에 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비디오를 고르다 말고 가서 영화 좀 시켜 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매니저 같은 분들이 저를 끌어냈죠. 그 때는 누굴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이 절박하기만 했던 거죠.


극장이 절실한 도피처였다

김태훈 : 저도 중ㆍ고등학교 때 영화를 참 많이 보러 다녔던 세대 중에 한 명인데요. 그것이 단순하게 당시의 힘들었던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처로 사용된 친구들이 있었던 반면에, 류승완 감독님의 행보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조금 더 그 안에서 현실적이고 간절하고, 또 그것을이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거죠. 분명히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류승완 : 저는 극장이 절실한 도피처였어요.

김태훈 : 남들보다 더 한 절실함이요?

류승완 : 네. 굉장히 절실한 도피처였죠.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그냥 혼자 극장을 다녔던 것 같은데요. 그 전에는 아버지, 작은 아버지와 극장을 다녔어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죠. 영화를 너무 좋아하시던 분들이었어요. 아버지가 항상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같은 걸 보면 ‘저 배우는 누구야, 저 영화는 어떤 얘기야’ 이런 걸 설명해주셨어요. <벤허>를 보면서 ‘내 이름은’이 영어로 ‘My name is’라는 걸 배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부모님 두 분 다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병실에서 병간호하고 생활해야만 하는 너무 고통스런 현실이 된 거죠. 어려서 정말 풍족하게 살다가 갑자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가난을 경험하려니까 힘들었죠. 항상 컸던 내 방과 마당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용돈을 주던 사람들이 타지로 오면서 완전히 다 사라지고, 친구도 없고. 그런데 동시 상영관은 그때 2500원을 내면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잖아요.

김태훈 : 그렇죠. 영화 끝났다고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류승완 : 네. 그리고 휴게실에서 비디오를 틀어주고 있었고요. 그러니까 2500원이면 제가 온전하게 뭔가를 잊을 수 있는 거예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 극장에서 해주는 동시 상영 영화 두 편을 두 번씩 내리 보고, 휴게실에서 틀어주는 홍콩 무협 시리즈 같은 것들을 보고요.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고, 내가 보기 싫은 현실에 없어도 되니까요. 여기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니까 계속 그 세계 안에서 자극 받고, 아예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죠. 극장을 못 갈 때는 영화 잡지를 보고 사진 있는 그림을 옮겨 그리고, 글로 끄적이면서 시간을 보냈죠. 어쨌든 여기의 현실에서 빠져나가고 싶으니까요. 제가 지금 ‘내가 정말로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인가? 소위 영화광, 매니아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저는 재개봉관의 문화를 더 좋아했던 건 아닌가, 싶어요.




요즘 고민하는 건 온전한 개인의 문제

김태훈 : 누군가 드라마를 이렇게 정의한 적 있어요. ‘어떤 일상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분투하는 이야기다’라고. 감독님의 데뷔작부터 최근 작품인 <베를린>까지 보게 되면 제도에서 버림 받았는데, 비록 그 곳이 폭력조직 같은 음성적인 것이라고 해도, 버려진 그 곳으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야기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베를린> 까지 계속 이어지는 거 같아요. 재미있는 것은 ‘본 시리즈’처럼 벗어나고 도망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다시 복귀하기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여지거든요.

류승완 : 그러네요. 저도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 해봤는데요. 지금 하신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드라마라는 것이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악전고투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무의식 중에 그것은 작용을 한 것 같아요. 뭔가 안정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런데 그게 제도라고까지는 생각을 못 해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본 시리즈’하고의 가장 큰 차이가 그것이겠네요. 사실은 저의 정체성, 자존감에 대해서 의식을 하게 된 것이 얼마 안 돼요. 놀랍게도. 최근 1~2년 사이의 일이에요.

김태훈 : 그 이전까지 영화는 그냥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셨던 거군요.

류승완 : 네. 왜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좋으니까 했던 거죠. 사실은 저를 돌아볼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든다는 게 제가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갖게 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상과 일하는 시간의 경계가 아예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걸 왜 좋아하지?’라는 질문을 제대로 던져 볼 시간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제가 데뷔도 굉장히 일찍 했고, 약간 요란하게 데뷔했잖아요. 남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잘하나 보다’ 그러면서 온 거예요. 최근에 제가 마흔이 넘으면서 ‘지금 나를 좀 돌아봐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이런 질문을 요즘에 던지기 시작했죠.

김태훈 : 그 대답을 찾게 된다면 영화도 변하게 될까요? 류승완 감독님의 데뷔작부터 쭉 훑어보면, 사실 <아라한 장풍대작전> 정도를 빼놓고 보면 거의 다 염세적이에요. <주먹이 운다> 같은 경우도 두 명의 배우가 격돌하는 상황 자체가 결국 누군가에게는 해피엔딩일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비극적이라는 것을 출발부터 이미 상정하고 시작하는 영화였잖아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류나 혹은 제도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들이 그것으로 재편입 혹은 그 안의 주류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은 들어가지 못하는.

류승완 : 요즘 고민하는 건 온전한 개인의 문제예요. 지금 ‘제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제가 자꾸만 한 발 빼는 이유는, ‘세상 모든 제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행복할 수 있는 개인의 삶은 뭘까’하는 물음 때문이거든요. 결국 내가 눈을 떠야 세상도 있는 것이고,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거잖아요. 우리가 투표를 통해서 세상을 조금 더 좋게 만들자고 아무리 구호를 외쳐 봐도, 결국 자기가 불행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들과 다르다’ 선을 긋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김태훈 : 자기가 행복해질 수 있는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논문으로도 수십 편이 발표됐다고 하는 것이 ‘속물과 잉여론’이거든요. 결국 물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최우선으로 삼는 속물의 계급과 그 주류에 진입하지 못해서 끊임없이 주변을 맴도는 잉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결국은 자기의 온전한 자존감, 온전한 자기만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맞춰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분류에요. 류승완 감독님은 어린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보면 자기만의 세계, 자기의 행복, 온전히 나만의 주관적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온 것 같은데요.

류승완 : 저는 보시는 것보다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남들이 좋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던 사람인데요.

김태훈 :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올곧게 한 방향을 집요하게 판 사람이잖아요?

류승완 : 그건 취향이 세서 그런 것 같아요. 자존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말씀하신 부분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잖아요. 요즘 <잉투기>라는 영화도 그렇고, 최근에 젊은 세대들의 큰 화두가 잉여잖아요. 그런데 저는 잉여라는 그 표현에도 조금 저항감이 생겨요. 어쨌든 개개인들이 자기 존재 가치가 분명히 있는 사람들인데 왜 이들을 잉여로 봐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김태훈 : 잉여라고 명칭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소위 제도권과 주류에서 바라봤을 때 잉여로서 보여지는 거죠.

류승완 : 저는 일단 그런 주류로부터의 생각을 무너뜨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언젠가 강연에서 어떤 분이 저에게 ‘류승완 감독님은 부자인가요?’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숨도 안 쉬고 부자라고 대답했어요. 일하는 사무실에 내 방도 있고, 차도 집도 있고. 내 아이들 굶기지 않고 삼시 세끼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친구들 만나면 술 살 수 있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은행 대출 받으려고 고개 숙이지 않으니까 부자라는 거죠. 그런데 이걸 상대적인 조건으로 보자면, 재벌가에서 저를 부자라고 보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일의 측면에서는 몇 년 전까지 정말 괴로웠어요. ‘나는 왜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를 못 만들까, 왜 내 손에서는 걸작이 나오지 않을까’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예요. 또 저와 친한 동시대 감독들이 영화를 정말 잘 만드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선을 긋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김태훈 : 선을 그을 수 있었던 사건이나 생각이 있었나요?

류승완 : 사건이라기보다, 예를 들면 박찬욱 감독님은 저처럼 상스러운 장면은 잘 못 만들 것 같아요(웃음).

김태훈 : (웃음) 커피도 원두만 드시는 분 같고 말이죠.

류승완 : 그러니까 맥심 진하게 타서 마시고 침 진하게 뱉는 그런 건 안 될 것 같아요. 예전에 한 번 동생(류승범)이 양조위랑 뮤직비디오를 찍고 나서 ‘양조위 같이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박 감독님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침을 잘 뱉는 배우야’라고 하셨거든요(웃음). 아예 영역을 다르게 생각하면 편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구석진 극장에서 인디 포럼할 때 10분짜리 내 영화를 보고 좋아하던 열다섯 명 정도의 관객들만 있어도 무지 오랜 시간 동안 즐거워하던 사람이었잖아요.

김태훈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시점의 류승완 감독님 영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류승완 : <부당거래>하고 <베를린>인 것 같아요. 특히 <부당거래>를 할 때가 전작 <다찌마와 리> 극장판이 완전히 흥행에 실패했던 때에요. 제가 영화감독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가 영화를 그만둬야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오히려 절박함이 없었어요. 이거 안 되면 다른 거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태훈 : 왜 그랬을까요? 나는 박찬욱도, 봉준호도 아니라는 편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류승완 : 사실 이 세계는 내가 아무리 하고 싶더라도 산업이 원하지 않고 대중들이 원하지 않으면 떠나야 하는 거잖아요. 그 공포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게 현실로 다가오면서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리니까 ‘그냥 한 번 휙 떨어져보면 되지 뭐’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이거 안 되면 딴 거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조금 편해지더라고요.

김태훈 : 현장에서 직접 느끼셨어요?

류승완 : 네. 제가 <부당거래> 전까지는 현장 끝나고 배우들과 술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다음 날 촬영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부당거래> 촬영하면서 술도 늘었고요, 촬영 끝나고 사람들이랑 당구도 함께 쳤어요.

김태훈 : (웃음) 말 그대로 편하게, 내려놓고 만드신 거죠.

류승완 : 네. 그러니까 완전히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회복이 되고, 자신감도 얻고, 정말 좋은 경험이었죠.

김태훈 : 영화 개봉 뒤에 결과에 대해서 깜짝 놀라셨겠어요.

류승완 : 네. 사람들이 다 이 영화 잘 안 될 거라고 얘기했었거든요. <부당거래>가 비수기에 개봉했잖아요. 배급사에서도 아무도 영화에 대해서 자신을 못 했던 거예요. 큰 시장에 내 놓으면 깨질 거 뻔하니까 일단 비수기에 개봉하자고 했던 거죠.

김태훈 : 더군다나 비평적으로는 거의 극찬을 받았던 영화 중에 한 편인데요. 그 해에 나왔던 최고의 영화 중에 하나였어요. 느낌이 어떠셨어요? ‘나는 왜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못 될까’라고 생각하신 적도 있었는데 <부당거래>는 그 해에 어느 감독 부럽지 않은 만큼의 극찬을 받았잖아요.

류승완 : 저는 그때 기분이 정말 좋기도 하면서, 기분이 진짜 나쁘기도 했어요. 비평에 대해서는 정말 고마운데, 산업에 대해서 기분이 안 좋았죠. <부당거래> 이전에는 시사회 같은 곳에서 과거 영화 일 때문에 만났던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 그들이 손을 금방 빼려는 게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부당거래> 끝나고 나서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악수하는데 악력이 다른 거예요. 그런 일을 두세 번 경험하고 나서 <신세계> 제작했던 한재덕 프로듀서하고 담배 피면서 ‘잘 되고 볼 일이라고’ 얘기했었어요. 예전에 선배들이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던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죠. 오히려 저는 <부당거래>가 끝나고 나서 펀치가 세진 게 아니라 맷집이 세졌던 것 같아요.




겁먹지 않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김태훈 :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 말씀을 드리면, 이 인터뷰 자체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우리들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줘야만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거에요. 처음 기획 단계에서 <채널예스>와 같이 얘기했던 게 뭐냐 하면, 학원을 다니고 서울대학교에 가야 되고 대기업에 가는 것만이 삶이 아니라는 거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힘든 아이들이 나름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기획을 하게 된 거죠.

류승완겁먹지 않는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김태훈 : 겁먹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류승완 : 그냥 해봐야죠, 뭐.

김태훈 : 일단 해본다?!

류승완 : 네. 일단 해보고, 겁먹지 않는 데 제일 좋은 운동은 복싱이고요(웃음). 맞아도 별 거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웃음)

김태훈 : 공교롭게도 제가 복싱을 2년 좀 넘게 했는데, 처음에 몰랐어요. 스파링을 많이 해서 많이 맞으면 눈을 안 감는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아니라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맞으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더라고요. 그런데 싸우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몸을 앞으로 수그리게 되는데,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위로 치켜뜨면 눈이 안 감겨요. 그래서 눈을 안 감는다는 건 결국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거구나 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류승완 : 눈 뜨고 맞으면 더 성질나요(일동 웃음). 저는 오랜 시간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아까 펀치와 맷집 이야기도 했지만, 챔피언이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때리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맞는 것도 잘 맞아야 돼요. 맞는 걸 기술적으로 맞아서 게임 운영을 잘 하는 사람이 챔피언이 된다는 거죠. 사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이무영 선배나 박찬욱 감독님의 ‘아니면 말고’ 정신. 젊어서 많은 경험을 해서 어떤 절실함도 없고 그냥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는 가장 부러워요. 제 동생이 그렇거든요.

김태훈 : 그렇죠. 류승범 씨는 클럽 디제잉부터 시작해서.

류승완 : 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버는 대중 스타의 자리에도 있어 봤고, 이게 다 별게 아닌 거예요. 자기가 살아가는 데 본질을 채워주는 게 아닌 거예요.

김태훈 : 배가본드(vagabond, 방랑자)의 느낌이 가장 강한 캐릭터 중에 한 명이죠.

류승완 : 네. 지금은 파리에 있는데요. 파리의 아주 작은 클럽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는 친구들하고 디제잉하고, 페이 조금 받으면서 정말 최저 생계비로 생활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제 동생을 보면서 정말 부러워요. 그건 많은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태도 같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또 찾아서 끊임없이 시도해 봤으면 좋겠어요. 회사에 충성하면서 살거나 공부하느라고 인생을 다 소비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태훈 : 제가 아는 분도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서 1년의 6개월을 빌딩을 닦으시는 데요. 6개월 빌딩을 닦고 6개월을 히말라야에 가 있어요.

류승완 : 진정한 사나이죠.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을 살고 계신데요.

1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류승완 감독은 지방에서 특강이 있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에서 부산함이 느껴졌다. 아직 자신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기에는 이른,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한 소년의 모습이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룸미러에 비친 흰머리를 보며 문득 염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획_ 엄지혜 기자
정리_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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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듣고, 보고, 읽고를 통해 세상을 생각해본다. 삐딱한 편견으로 40여 년을 살았고, 그 편견을 깨기 위해 나머지 시간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류승완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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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잡지 않고 자기 색깔 내는 영화감독 류승완 작살 웃음과 호쾌한 액션 뒤에 숨은 그의 모든 것!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뒤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를 거쳐 2008년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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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단 하나, 사랑

임경선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주인공의 일기를 홈쳐보듯 읽는 내내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그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누구나 겪었을 뜨거운 시간을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해낸 소설.

매혹적인 서울 근현대 건축물

10년째 전국의 건축물을 답사해온 김예슬 저자가 서울의 집, 학교, 병원, 박물관을 걸으며 도시가 겪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이 책은 도시의 풍경이 스마트폰 화면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당신의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게 해줄 것이다.

2024 비룡소 문학상 대상

비룡소 문학상이 4년 만의 대상 수상작과 함께 돌아왔다. 새 학교에 새 반, 새 친구들까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처음’을 맞이하고 있는 1학년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이 눈부신 작품. 다가오는 봄, 여전히 교실이 낯설고 어색한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전한다.

마음까지 씻고 가는 개욕탕으로 오시개!

『마음버스』 『사자마트』 로 함께 사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김유X소복이 작가의 신작 그림책. 사람들이 곤히 잠든 밤, 힘들고 지친 개들의 휴식처 개욕탕이 문을 엽니다! 속상한 일, 화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까지 깨끗히 씻어 내는 개욕탕으로 오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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