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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이라는 독(毒), 그녀의 ‘줄넘기’와 ‘눈물’ 사용법

글쓴이: Katikati Lighthouse | 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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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읽는다. 내게는 낯선 작가인데, 오랜만에 내 블로그에 들른 작은 우주님을 통해서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좋은 소설들을 찾아 읽는 감식안이 상당히 높은 수준인 그녀가 요즘 가장 애독하는 국내작가가 바로 천운영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풀꽃의 이름처럼 들리기도 하는 작가의 이름에서 내가 우선 떠올린 것은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의 난초였다. 까다롭게 꽃을 피워 올린 우아한 난초의 자태나 은은한 향기처럼 어쩐지 무척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씌어진 몹시도 여성스러운 작품들이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아뿔싸, 몇 쪽 읽지 않고서도 이름에 기댄 어설픈 내 짐작이 빗나갔음을 나는 알아챘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또 틀린 셈이었지만, 나로서는 반가운 빗나감이었으니 유쾌한 것이기도 했다. 여성작가가 쓴 너무나 여성스러운 작품이라면 좀 뻔하고 지겨워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 티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누드 사진을 찍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중년의 사진사가 젊은 여인을 카메라 앞에 두고 촬영하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장들 앞에서 나는 환호작약했다.


 


배경지 위에 여자가 엎드린다. 바닥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항아리에서 쏟아져나온 물줄기처럼 보여야 한다. 여자는 다행히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다. 어깨도 적당히 말랐고 목뼈도 제법 선이 난다. 엉덩이에 살이 좀 많은 게 흠이지만 각도를 잘 조절하면 괜찮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는 호흡을 멈춘 채 첫 셔터를 누른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피사체의 오른쪽 측면에서 내리꽂히는 텅스텐 조명. 엉덩이를 휘감았다가 재빨리 돌아가는 섬광 같은 채찍질.


어서 일어나 물을 길어. 도드라진 등뼈에 가 박히는 한줄기 붉은 선. 이 비천하고 더러운 몸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더러운 욕망아. 어김없이 후려치는 매서운 채찍질. 울어라, 소리쳐라, 절규해라. 애원하는 등뼈, 절망하는 목, 울고 있는 어깨, 순종하는 엉덩이. 그는 살점이 뜯겨나가고 피가 낭자해질 때까지 가혹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다. 무의미하던 여자의 몸이 살아움직이기 시작한다. (10~11,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이렇게 단문으로 이어지는 속도감 있는 문장들은 숨가쁘게 읽히고 그 사이 사이에 배치해 놓은 명사어구들은 마치 빠른 속도로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놓인 징검돌처럼 독자의 호흡을 잡아채서 잠시 숨을 돌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독자는 짧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빠른 속도에 휩쓸리거나 시냇물에 빠지는 일 없이도 이 가파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급류의 시냇물을 무사히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솜씨 좋은 시인이 공들여 쓴 한 편의 산문시를 방불케 하는 이러한 뛰어난 문장들은 어쩌다 눈에 띄는 예외적인 게 아니다. 이 소설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도 없이 출몰한다.


 


윤성희가 그런 것처럼, 또한 박민규가 그런 것처럼, 천운영도 자기 스타일이 이미 문장에 확실하게 새겨져 있는 작가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위해 보기 드문 추천의 글을 써주면서 박민규가 대놓고 고백하고 있는 천운영에 대한 편애가 내게는 조금도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드물지만 세상엔 그런 류의 책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세계의 극 ∙ 소 ∙ 수 ∙ 만이 그녀의 책을 읽었으면 하는 입장이다. 아니, 실은 누구도 모르게 오직 나만이 <그녀>를 읽고 싶은 마음이다. (중략)


드물게,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 알 것이다, 이 세계의 상처가 얼마나 교묘한 것인지를.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 것인가를. ()이 왜 독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가를, 알 것이다. 독은 가장 약한 짐승에 의한, 가장 약한 짐승을 위한 유일한 무기이자 치유책이다. <천운영>이라는 유일한 글을, 그래서 나는 상처가 없는 무리를 향해 던지고 싶지 않다. (중략) 당신도 <그녀>의 글도 유일하고 유일, 무이하다. 그러니 당신도 아물고 회복해줘. 제발, 부탁이야. (뒷표지, 박민규의 추천사)


 


동료 소설가로서의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박민규의 이러한 간곡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집에 수록된 천운영의 소설들을 읽고 나면 누구라도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 수 없다. 뭔가 마음에 옹이가 져서 개운치 못한 심정이거나 세상 사는 일에 큰 상처를 받고 채 아물지 못한 흉터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따뜻한 위안을 받고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의 주인공들이 마주하고 있는 상실결핍은 그 모양과 크기에 있어서는 제법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상실과 결핍의 내용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따스한 결말은, 자신이 창조해낸 소설 속 주인공을 향해, 또한 그 소설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을 향해, 작가 천운영이 건네는 악수이자 포옹이다.


 


뚜렷하게 나뉘어진 채 각자의 세계를 고집하던 의 단절된 관계는, ‘연대라고 달리 부를 수 있는 이 악수를 통해서 우리로 통합되는 계기를 얻는다. 3대가 함께 살고 있지만 산산이 조각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혼혈 가족의 모습을 혼혈아 손녀 알리의 따스한 시각으로 그려낸 단편 「알리의 줄넘기」가 보여주고 있는 결말이 바로 그렇다. 혼혈아에게 적대적인 또래녀석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체력단련의 목적으로 시작된 알리의 줄넘기가 이제 여러 사람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놀이로 변모할 것이라는 예감에, 독자의 마음은 훈훈해진다.


 


나는 장롱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밖으로 나왔다. 나는 지금 줄넘기를 사러 간다. 손잡이가 나무로 된 줄넘기를 사야지. 그래야 이름을 적어넣을 수 있으니까.


요즘에 내가 연습하고 있는 것은 솔개뛰기다. 이단뛰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엇갈렸다 풀기를 반복하는 것이 어려워 솔개뛰기를 완성시킬 수가 없다. 언제쯤 슈욱슉 바람을 가르는 솔개의 날갯짓 소리가 날 것인가. 솔개뛰기를 하고 나면 삼단뛰기와 사단뛰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블더치를 하려면 두 개의 줄넘기와 적어도 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줄넘기를 하나 더 사러 가는 것이다. 줄넘기를 사면 손잡이에 더블더치를 할 우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어야지. 나는 지금 우리를 만나러 간다. (102~103, 「알리의 줄넘기」)


 


를 향해 내민 의 손이 우리의 두 손으로 서로 맞잡게 되는 이 연대의 악수는 자연스럽게 포옹으로 이어지는데, 그 포옹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포옹에 의해, 자포자기와 자기연민에 빠져 절망 속에서 흘리는 차가운 눈물은 자신의 재발견과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따스한 눈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겠다. 이 책의 표제작인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린 동생에게 빙의된 채 삼십 년을 살아온 한 젊은 여인이 들려주는 어두운 가족사를 통해서 이러한 눈물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나머지 작품들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 역시 이러한 악수(또는 줄넘기 사용법)와 포옹(또는 눈물 사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작가 천운영이 그녀의 줄넘기눈물사용법을 통해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따스하고 소망스러운 세계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때 되면 허물을 벗는 뱀처럼 우리도 자신의 허물을 벗어야만이 이러한 연대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허물은 뱀에게는 단지 살갗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살갗의 껍질(, 신분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과오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허물 벗기는 뱀의 경우보다 훨씬 더 힘겨운 일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허물 벗기를 시도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며, 그래서 마침내는 사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인상적인 단편 「내가 데려다줄게」에서, 젊은 여제자와 성관계를 맺은 일이 권력형 스캔들로 번져 학교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 한 사내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란, 그러니 자살이 아니라 허물 벗기일 수밖에 없다. 사내에게 그걸 가르쳐주는 것은 어린 계집애이다.


 


계집애가 사내 손에 뱀허물을 올려놓았다. 새끼 뱀의 첫 허물은 거칠거칠하고 바싹 메말라 있었다. 사내와 계집애는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뱀허물을 들여다보았다. 계집애는 삼각형 모양의 머리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아저씨, 그거 알아? 뱀들이 허물벗을 때가 되면 눈이 뿌옇게 흐려져. 안개낀 것처럼.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니?


맨날맨날 보는 게 뱀인걸 뭐. 허물벗을 때가 되면 늪으로 오거든. 할머니가 그러는데 몸을 말려야 허물이 잘 벗어진대. 그래서 며칠 동안 물 한모금 안 마시면서 몸에 물기를 없애는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목이 마르겠어. 허물 다 벗으면 얼른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늪으로 온다는 거지.


뱀들은 허물을 벗기 위해 흐린 안개 눈을 하고 늪으로 온다. 사내는 손에 든 허물을 보며 되뇌었다. (115, 「내가 데려다줄게」)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질책을 피해 차를 달리던 사내가 국도에서 맞닥뜨린 안개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멈추게 된 곳이 거대한 늪가였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내는 거기서 충동적으로 짧은 유서를 쓰고 옷을 차에 다 벗어놓은 채 늪으로 걸어 들어가 즉흥적인 자살을 시도하는데, 마침 그때 그 늪에서 물질을 하던 여인에 의해서 구조된다. 그리고 위 인용문에 보이는 것처럼, 그 집에 사는 당돌한 어린 계집애의 가르침에 맞닥뜨리면서 어렴풋이 자신의 과오를 되새기게 된다. 이후 자신을 구해준 여인에게 느끼는 욕망의 은밀한 진퇴와 폭력적인 파국을 거치면서, 사내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가둬두었던 진실의 모습을 마침내 보게 된다. 그 동안 스스로는 부인했던 자신의 허물, 즉 그가 젊은 여제자에게 한 일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그녀를 농락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내는 다시 늪 앞에 서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옷을 벗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사내의 발목을 휘감을 뱀들을. 그리하여 그 뱀들이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벗겨주기를.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벗고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갱생의 몸짓이다. 맹독을 가진 뱀들에게 물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사내가 무릅쓰는 것은, 아니 오히려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며 기다리는 것은, 앞서 박민규가 말한 것처럼 독()은 독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뱀들의 독에 의해서, 사내는 마침내 자신의 허물을 벗고, 자신이 젊은 여제자에게 주었던 상처에 스며든 독까지도 해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천운영의 소설들은 그 자체가 독()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독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이자 치유책이다. 세상과 맞서 싸울 때는, 그 독은 우리의 손이 함께 맞잡고 돌리는 줄넘기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불평등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 독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치료하는 데 쓰일 때는, 따스한 눈물이 되어서, 늙고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잊혀지고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그게 너무나 아름답고 따스해서 나는 기꺼이 그녀의 독을 받는다.


 


내 친구 작은 우주님이 작가 천운영에게 빠진 이유를 이 책 『그녀의 눈물 사용법』 한 권만 읽고서도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운영의 독은 한번 물리고 나면 그 어떤 해독제를 쓰더라도 쉽사리 빠져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중독성인 것을. 그 강력한 중독성을 이기지 못해, 지금 내 손에는 천운영의 장편소설 『생강』이 이미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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