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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은 어떻게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나?

글쓴이: REMEMBER 0416 |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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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상앙'이다. 상앙은 천하를 통일하여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던 진나라의 기틀을 다진 재상이다.(중국의 재상은 오늘날로 치면 CEO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오른팔로서 나라의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자리다.) 상앙이 재상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진나라는 별 볼일 없는 변방의 약소국에 불과했다.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랬던 나라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언제 휙하니 꺼져서 망각 속으로 사라질 지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그랬던 나라를 과감한 국정 개혁을 통해 강대국으로 발돋음 하게 한 이가 바로 상앙이었다. 그의 개혁이 너무도 눈부신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아직도 상앙은 강국책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다. 상군서는 바로 그러한 상앙이 쓴 책이다.


 




 


 


 


 상앙의 본명은 공손앙으로 원래는 위(衛)나라 측실의 아들이었다. 서자에 대한 대접은 홍길동이 그랬듯이 그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상앙은 일찌기 학문을 연마했으나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당시 전국시대는 인재가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었으므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중용했는데 때문에 상앙은 자신의 재주를 귀히 여겨 줄 이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났다 결국 진나라 효공에 의해 중용되게 된다. 당시 진나라는 왕이 죽으면 그 신하들까지 모두 자결하여 뒤를 따르게 하였으므로 이전의 왕 목공의 죽음으로 모든 신하들이 죽어버려 그렇지 않아도 인재가 절실하던 처지였다. 거기서 진나라를 부국강병하기 위하여 내세운 정책은 '의행무명(疑行無名) , 의사무공(疑事無功)', 즉 주저하면서 행동하면 명예를 얻을 수 없고 주저하면서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추진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어기면 절대 예외를 두지 않는 철저한 법치(法治)였다. 왕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상앙은 그런 예외가 나라의 힘을 갉아먹는 좀벌레라고 여겼다. 그가 그렇게까지 법치를 철저하게 추구했던 것은 독일의 유명한 법학자 라드부르흐가 법의 3대 이념이라고도 말한 바 있는 법적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법의 힘이 문자그대로 지켜질 것임을 신뢰하여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군서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간사한 일을 금하고 과오를 그치게 하는 방안 가운데 엄형(엄중한 형벌)보다 나은 게 없다. 형벌이 엄중하고 범법자를 처벌하면 백성들 가운데 감히 시험 삼아 법을 범하는 자가 없게 된다. 나라에 형벌을 받은 사람이 없는 이유다. 나라에 형벌을 받은 사람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은 말하기를 "명확한 형벌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P. 208)


 


 독일의 형법학자 포이에르 바흐는 형법의 목적을 범법의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예방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상앙의 이 말은 그와 비슷하다. 범죄의 형태를 법률로 확실히 규정해놓고 이를 예외없이 일벌백계로 다스리면 그 위화효과 때문에라도 다른 이들이 범죄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현실을 생각해보면 상앙의 이 말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이제 거의 공공연해진 사실이다. 국회에서 하는 인사청문회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청문회만 하면 나오는 위장전입이나 논문표절 같은 위법 사실들은 서민들이 하면 범죄지만 가진 자들이 하면 관행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예외들을 보면서 일반 사람들에겐 법을 준수하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법의 예외없는 엄격한 집행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법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척도이며 나아가서는 체제를 오래도록 안정화시키는 기틀이라는 상앙의 말은 정말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비단 형벌의 측면만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떨치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러한 법치는 좋은 텃밭이 될 수 있다. 상앙은 말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포학하지 않고 상을 주는 것이 인자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법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성인은 공에 따라 관직을 내리고 수여한다. 유능한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는 이유다. 성인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 형벌을 사면하지 않는다. 간사한 자가 생기지 않는 이유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릴 때 오직 포상과 형벌, 교화등 3가지 사안의 통일을 살필 따름이다. (P. 216)


 


 즉 명확한 법과 엄중한 집행이 공정성 또한 보장하기 때문이다. 후기 조선의 세도정치 때도 그랬지만 이 때의 진나라도 벼슬길에 오르는 온갖 뒷구멍들이 있어서 능력있는 자들이 밀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더러 절차대로 공정하게 치뤄줄 것을 요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을 저지르던 자들은 군림하는 고관대작들이었기 때문에 곧잘 무시되었다. 상앙은 이것을 개혁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관원을 임용하는 법제도가 공정하기 때문에 지모가 뛰어난 사람을 임용하지 않는다.(P. 50)


 


 어떤 벼슬 자리든지 절차를 엄격히 준수하지 않고서는 오르지 못하게 했다. 뒷구멍을 통해 온갖 뇌물등 사적 이익을 취해오던 고관대작들은 그래서 상앙을 곱게 보지 않았고 더구나 철저한 개혁과 법치로 인해 그동안 누리던 특권마저 빼앗기게 되자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상앙의 든든한 후원군이던 효공이 죽자 바로 그의 목숨을 노렸다. 결국 상앙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끝까지 관철시켰던 법치 때문이기도 했다. 상앙이 그들의 음모를 알고 미리 피했지만 철저히 법을 준수하려는 관원들과 백성들 때문에 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상앙은 자신이 뿌리내리게 한 법치 때문에 죽은 것이다. 사마천도 이를 두고 상앙을 비판했다. 나라를 강건하게 만든 공은 인정하지만 형벌이 지은 죄에 비해서 너무도 무겁고 또한 융통성이 없는 것은 잘못이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상앙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법치를 밀고 나갔던 것은 전국시대와도 같은 난세에 약소국인 진나라가 존립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신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야 말로 나라가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그는 여겼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주고 싶었고 그 믿음을 통해 나라의 존속을 기대하며 협력을 이끌어내려 했다.


 


 성인은 치국의 요체를 알고 있다.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농사짓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P. 56)


 


 그랬던 상앙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진나라는 변방의 약소국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상군서는 이러한 상앙 사상의 중추가 담겨있는 책이다. 실제 통치자로서의 경험이 있는만큼 여기에 담긴 말들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물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유불급이라고 그의 비극적 최후마저 초래한 과도한 법집행은 확실히 문제였다. 또한 상앙은 부국강병은 오로지 역량의 집중에 있다고 보아 백성들에게 농사만 짓도록 했는데 그러한 측면에서 자유를 억압했고 다양성 또한 희생했다. 이는 '우민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이렇게 비록 일장일단은 있으나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역량을 어떻게 하면 집중시켜 성장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군서'만한 참고서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정말 귀 기울여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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