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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는 강력한 미신이다

글쓴이: 자하님의 블로그 |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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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는 강력한 미신이다. 편협한 강박적 사고에 강렬한 원한의 감정을 버무린 것이 바로 인종차별주의다. 인종주의는 사이비과학(이를 '유사과학'이라고 미화하지는 말자)에 근거하여 보수 언론지에 의해 확산되는 전염병과 같다. 흔히들 불확실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미신적 행위나 마법적 사고도 증가한다고 하는데, 반유대주의는 19세기 격변하는 유럽이 찾은 손쉬운, 허나 해로운 미신이었다. 이 책에서도 각종 음모론을 비롯해 사탄숭배자들, 신비술사들의 이야기가 감초처럼 등장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작정하고 자신의 이 역사소설을 근대 유럽의 어두운 이면을 탐구하는 역사사회학적 작업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제2권에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데  《유대인의 프랑스》의 저자이자 반유대주의 연맹의 창설자 에두아르 드뤼몽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파나마 운하 비리를 파헤쳐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파란을 일으킨 언론인이다.


 
"셈족은 돈을 지나치게 밝히고 욕심이 많으며 음모를 잘 꾸미고 교활한 반면, 우리 아리아인들은 열광에 잘 빠지고 영웅과 기사의 풍모를 좋아하며 사리사욕이 없고 솔직한 데다 어수룩하다 싶을 만큼 남을 잘 믿네. 셈족은 땅거죽에 붙어사는 자들이라서 현재의 삶 너머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해. 그들의 성서에서 현실 밖의 세계를 언급한 대목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리아인은 언제나 초월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네. 기독교의 신은 하늘 높은 곳에 있고, 유대인의 신은 산이나 덤불 속에서 나타날 뿐 그보다 높은 곳에서 출현하지 않아. 셈족이 장사꾼이라면, 아리아인들은 농부, 시인, 수도사,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일세. 셈족은 창조력이 전혀 없어. 훌륭한 음악가나 화가나 시인 중에 어디 유대인이 있던가? 과학적인 발견을 한 유대인을 본 적이 있어? 아리아인을은 발명을 하고, 셈족은 그 발명들을 이용하지."(604쪽)
 
19세기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일종의 보편적인 경향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이토록 심각한 상황이었구나, 라는 뒤늦은 깨달음을 준다. 반유대주의의 편견은 심지어 예수의 유대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혹자는 그리스도가 유대인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퍼뜨린 전설이었다는 둥, 현란한 말빨로 예수를 프랑스인처럼 캘트족의 일원으로 간주하는데, 나는 문득 공자를 한국인처럼 예맥족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우리네 철부지 민족주의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동정녀 마리아설을 켈트족과 드루이트교의 신화로 간주하는 데에선 두 손 다 들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프랑스인들과 한국인들은 닮은 점이 꽤 많다.  
 
사실 인종적 편견에 사용되는 억지는 대동소이하다. 인종차별의 내용은 독창적이지 않고 고루하다. 양키의 흑인 차별이나 나치의 유대인 차별이나 일제의 조선인 차별이나 그러하다. 가령 앞의 드뤼몽의 인용문을 놓고 보자면, '셈족'에다 우리가 싫어하는 '일본인'의 이름을 새겨넣고 '아리아인들'에다 우리 한국인의 이름을 올리게 되면 꽤 그럴싸한 막걸리판 인종차별 담론이 되어버린다.
 
공포와 불안을 조장해서 인기를 유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객들의 노하우다. 오늘날 북한의 핵실험으로 야단법석인 한반도 정세를 살펴보면서 문득 눈에 밟히는 구절이 있어서 특기한다.
 
"고약한 지도자들이 있소. 공포와 사회 불안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클럽이나 레스토랑에 아주 느긋하게 앉아서 시를 논하고 샴페인을 마시는 자들 말이오."(624쪽)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인데 시모니니를 수하로 부리는 첩보요원 에뷔테른의 말이다. 정치인들과 언론인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에뷔테른은 마키아벨리즘의 귀재답게 공포의 힘을 악용하는 인사들을 비꼬고 있다. 참고로 소설에서 에뷔테른은 동시에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설정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면 메이슨 회원으로서의 그의 역할이 전혀 그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에코가 낌빡 잊어먹고 살을 붙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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